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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서 자유로운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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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은 네 식구입니다. 아주 단순한 구성인데 안에서나 밖에서나 거의 24시간 붙어 다니는 우리 부부와 두 살 터울의 딸이 둘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같이 출근하고, 가급적이면 아니 필사적으로 여섯 시에 퇴근해서 일곱 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려고 노력 합니다. 아이들도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보통 네 시 전후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균에 비해 비교적 집을 오래, 많이 사용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에서 철저히 좌식 혹은 와식 생활을 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거의 누워서 읽고 텔레비전을 볼 때도 거의 누워서 봅니다. 물론 그런 자세는 학교에서 배울 때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자세이긴 하지만, 제게는 가장 능률이 잘 오르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책상에 등받이가 있는 좌식의자를 놓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도면을 그리며 동시에 아이들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혹은 책을 읽습니다. 보편적인 집의 모습은 아니지만 제게 가장 맞는 방식입니다.

집에서 우리 식구들은 주로 모여 있습니다. 한곳에 모여서 책을 읽고, 모여서 공부와 일을 하고, 모여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꼭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우리 집에는 그냥 큰 방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안방이나 아이들 방은 방대로, 주방이나 화장실은 고유한 기능이 있다 보니 늘 사용이 되는데, 그다지 쓰임새도 없이 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거실입니다. 사람들은 거실에 앉을 때 소파에 앉는 것이 아니라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습니다. 우리에게 입식도 아니고 좌식도 아닌 곳, 거실은 참 엉거주춤한 공간입니다.

지금까지의 주거 양식에서 거실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보통 집의 중심이 되는 곳에 배치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택에서 거실은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었습니다. TV를 놓아야 했으니까요. 일일연속극, 주말연속극, 출근하기 전에 보는 아침 6시나 7시 뉴스, 혹은 저녁 9시 뉴스, 야구나 축구 중계, 가요 순위 프로 등등, 그런 것들을 꼬박꼬박 챙겨 보기 위해 우리는 거실에 모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거실이라는 공간은 집의 중심이지만, 굉장히 공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공간의 주인이 따로 없는 부분입니다. 식구들이 모두 자신의 공간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거실은 늘 머쓱하게 홀로 남습니다. 큰 텔레비전과 큰 소파, 그리고 여러 가지 집안의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장식들과 함께.

몇 년 전 어떤 신문사에서 거실을 서재로 만들자는 운동을 한참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들과 사회적인 명망가들이 참여하여 진행한 운동인데, 이후 그 서재들이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거실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쓰였기에 본연의 기능을 포맷해버리고 서재로 만들라고 하는 걸까 내심 궁금했습니다.

거실은 문이 없이 늘 열려 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갑니다. 어찌 보면 그냥 집 안에 정물화처럼 앉아 있습니다.

거실이란 공간이 언제부터 우리의 생활로 들어왔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주거가 서양식 주거를 받아들이면서, 한옥이 배척되고 한옥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전 근대적이라고 싸잡아 비난받던 당시가 아니었을까요? 근대화 혹은 나아가서 현대화된 생활양식의 상징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는 가장과 세련된 입식 부엌에서 차를 끓여 내오는 부인과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는(기껏해야 ‘소녀의 기도’ 정도지만) 아이들, 혹은 거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와 뜨개실을 무릎에 얹고 평화롭고 유순한 표정으로 그 정경을 지켜보는 자애로운 어머니, 그런 식의 약간 ‘키치(kitsch)’스러운 광경이 우리의 주거, 특히 모던 리빙을 주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정마다 마치 집안에 붙여 놓은 ‘가화만사성’ 액자처럼 거실들이 배급되었는데, 그것이 이제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실은 잘못 수입된 병균이 득실거리는 수입 과일 같기도 한, 정체성도 없고 한국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결정적으로 죽은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실이 점점 그 위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는 달라진 생활 패턴에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이란 약간은 사회적인 성격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외부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혹은 대가족이 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거실 공간과 같은 공적 영역이 아주 요긴했습니다.

결혼하거나 새로 이사를 하면 주변의 친구나 동료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집들이’가 거의 강요 내지 의무사항처럼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거실에 큰 상이 놓이고 직접 한 요리든 주문 배달한 중국요리든 한상 가득히 차린 음식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앉아 집에 대한 품평을 안주 삼아 거하게 치러지는 행사였죠. 집들이뿐만 아니라 어른의 생신이라든가 제사, 반상회 모임 등등이 거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거실은 한옥의 대청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실에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되었습니다. 화려한 전등, ‘아트 월’이라 부르는 보조 조명이 달린 장식 벽에 놓인 커다란 TV, 오디오 세트, 전집이 보기 좋게 꽂힌 튼튼한 책장, 실물 크기에 가까운 가족사진, 값비싼 가죽 소파…….

그러나 알다시피 요즘에 와서는 거실의 공적인 기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많은 손님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심지어 실례에 가까운 일입니다. 집안 행사는 호텔이나 대형 식당에서 치르고,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도 많이 줄었고, 결정적으로 각종 스마트한 IT기기들이 보급되면서 가족끼리 단란하게 모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거실은 집에 꼭 필요한 공간일까요? 얼마 전 들어보니 5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 주로 자식이 진학하거나 분가하면서 가족 수가 줄어든 사람들에게 아파트 면적을 줄여 이사할 생각이 있느냐는 설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사할 생각은 있으나 3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된다면, 30대 때 살았던 방 3개가 있는 구조 대신 방 개수를 줄이더라도 부엌과 거실의 면적은 50평형 아파트와 같은 구조였으면 한다는 답이 많았답니다. 남들이 볼 때 집을 줄여 이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었고, 집을 줄인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실패처럼 여겨진다는 의미겠지요.

세상의 변화와 유행에 그토록 민감하면서도 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왜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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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노은주,임형남 공저 | 예담
집을 짓기 전에, 이사를 가기 전에,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에, 집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책이다. 노은주ㆍ임형남 부부 건축가는,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하고,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소나기학교’의 기획을 맡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저자들은 집이 가족의 관계를 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과연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은주,임형남 저자의 집 이야기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게으른 여자를 위한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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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설계하면서 주인의 취향이나 성격이 가장 많이 반영되는 부분은 바로 부엌입니다. 주방이나 부엌 다 같은 말입니다. 한자어로 된 주방이라는 말이 어쩐지 더 현대적인 느낌이 들어서인지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는 모양인데, 저는 부엌이란 말이 더 익숙합니다. 음식 하는 일을 즐기지만 그 과정을 남들이 보는 걸 싫어한다고 부엌에 꼭 벽을 치고 가려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식구들과 대화도 나누고 TV도 함께 볼 수 있도록 개방된 아일랜드형 부엌을 만들어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후자가 대세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 오랜 시간 설계하고, 오랜 시간 검토와 토론을 하고, 지난한 행정절차와 시공자 선정을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려 하면, 다 되었습니다, 하는 순간 꼭 불거지는 문제가 부엌에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적인 가구와 집의 구성은 오랜 시간 협의하고 설계하고 시공한 대로 크게 방향이 바뀌지 않고 진행되는데, 부엌의 경우 많은 부분이 바뀝니다. 단순히 가구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창문의 모양도 바뀌고 동선도 바뀌게 됩니다. 식기세척기나 오븐, 김치냉장고 같은 기본적인 가전제품이 늘어나 생각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고, 특히 부엌 가구의 대표 격인 싱크대가 가장 두려운 복병입니다.

싱크대는 문자 그대로 물을 받아 그릇을 씻거나 야채를 씻는, 대부분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우묵한 함지가 달린 부엌용 작업대를 이릅니다. 그런데 그 싱크대에 이상한 기호와 이상한 의미와 이상한 상징이 부여되었습니다. 어떤 대기업의 제품이 싱크대의 대명사가 되어, 집에 그 브랜드 싱크대를 넣고 싶어 하는 것이 제가 만난 많은 주부들의 꿈입니다. 어쩌다 그런 신앙이 생겼을까요.

사실 싱크대는 예전에 우리네 부엌에서 어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고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하던 것을, 일어나서 작업을 하고 손쉽게 선반에 손을 뻗어 식기와 조미료를 넣고 빼낼 수 있게 만든 단순 수납장을 곁들인 작업대일 뿐입니다. 그리고 수납장으로 인해 부엌에서 발생하는 열과 습기가 벽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위생적으로도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고, 싱크대를 구성하는 나무 소재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도장이 그다지 인체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어찌된 것인지 모두 눈 가리고 귀 막은 채 유혹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 견고한 신앙을 깰 수가 없습니다.

예전처럼 집 바깥에 부엌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그것도 거실에 붙여서 만들다 보니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싱크대가 집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는 것은 집안에서 살림하는 안주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이 비슷하니 남들과 서로 비교하기도 쉽고, 집 안에서 거실 벽에 자랑스럽게 매달린 텔레비전 다음으로 보여주는 가구가 싱크대이니 사람들은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는 기능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데도 상표가 무엇이 붙어 있는가에 따라 싱크대에 무척 높은 금액이 책정되고, 그에 대해서는 일고의 반성이나 검증 없이 수용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싱크대는 어떤 신분의 표식이나 신분의 완성, 혹은 욕망의 현재화 등등의 의미가 투영되면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의 부엌, 그중에서도 대갓집의 화려한 부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혹은 어떤 프로그램으로 돌아갔는지를 자세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우리네 부엌, 벽돌이나 흙으로 쌓고 시멘트로 말끔히 미장한 부뚜막과, 그 위에 밥을 짓는 솥이 얹혀 있고 혹은 그 솥에 물을 데워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던 그 부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 채소를 씻고 설거지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던 부엌. 찬장이라고, 그릇을 수납하는, 대부분 나무로 짜서 만든 가구가 있었고, 쌀통은 마루나 비교적 건조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된장, 고추장 등은 뒷마당의 장독대에 있었습니다. 그 위로는 안방에서 부엌의 낮은 공간과 지붕 사이를 이용해서 만들어놓은 다락이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주부의 동선은 길고 자세는 구부정해서 보통 힘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심지어 더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나오는 깔끔한 수도꼭지가 달리고, 작업대 위 아래로 많은 그릇과 냄비와 조리도구들이 한꺼번에 수납되어 동선을 줄여주는 하나의 이름, ‘싱크대’가 등장하면서 주부들은 환호했습니다. 거기에 상하지 않게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찬장인 ‘냉장고’까지 등장하면서 모던 스타일 부엌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늘 좀 단순하고 적당한 가격의 싱크대를 주인께 권합니다. 물론 설계 초기에는 그런 좋은 명분과 실리적인 제안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작 싱크대를 설치하는 시점이 되면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모두 아는 고가의 싱크대가 부엌의 한쪽을 차지하게 됩니다. 싱크대 회사의 직원이 열심히 실측을 하고 가지만, 결국엔 늘 보아왔던 아주 익숙한 별로 다를 것 없는 싱크대가 들어옵니다. 게다가 그것도 유행이 있고 신제품이 나날이 등장하다 보니 그때그때 윗장, 아랫장, 그리고 다양한 상판들의 색상이라든가 재질을 가지고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갑니다.

저는 싱크대의 그 복잡함, 선택사양을 죽 나열하고 짝을 지어보라고 하는 그들의 상술도 맘에 들지 않지만, 현대의 우리 삶은 왜 이리도 말도 되지 않는 옵션의 나열과 선택과 조합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가에 좌절합니다. 그 많은 옵션 자체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로 시작하고, 그 안에서 어떤 반성이나 항의도 할 수 없고, 단지 우리는 고르고 써야만 한다는 것에 좌절합니다.

기본적으로 싱크대라는 것은 단순히 작업대입니다. 우리는 그저 편한 자세로 일을 하면 됩니다. 문 안쪽에, 상판 한 귀퉁이에 붙는 그 ‘라벨’에 집착해 두세 배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부엌일 중에 요리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 다행히 입맛 까다로운 식구가 없어서 가급적 몇 가지로 메뉴를 줄이는데도 한국 음식이란 게 차려보면 그릇 수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거지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그릇에 거품을 묻히고 닦아내는 그 시간 동안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릅니다. 종일 머리를 싸매고 책상 앞에 앉아 고민했던 문제들이 얼결에 시원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니, 저는 설거지 거리 앞에 서는 일을 좋아합니다.

대신 저는 요리하는 시간 동안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싱크대의 가장 불합리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싱크대 아래엔 보통 냄비나 프라이팬, 기타 잡동사니를 수납하는 장이 들어가 있는데, 그러다 보니 무릎을 넣을 데가 없어서 의자를 갖다놓고 앉을 수가 없는 형식입니다. 특히 한국요리는 몇 시간 동안 끓이거나 데치거나 하면서 조리과정을 계속 지켜보아야 하는 종류가 많은데, 이왕이면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다리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엌의 싱크대는 기성 제품이 아니라, 다리를 마치 일반 회의테이블처럼 따로 철제로 맞추고, 상판은 인조 대리석을 주문해서 4미터 길이의 긴 책상 같은 모양으로 조립했습니다. 싱크대는 책상보다는 10센티 미터 정도 높은 편이라 일반 의자로는 불편하니 스툴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도마를 놓고 하는 칼질도 앉아서 하고, 양념도 앉아서 섞고, 볶음이나 무침도 앉아서 할 수 있는 싱크대가 완성되었습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앉아서 책을 읽거나 딴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영 불성실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너무나 편안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는 거기에 ‘게으른 여자의 부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무척 흐뭇해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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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노은주,임형남 공저 | 예담
집을 짓기 전에, 이사를 가기 전에,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에, 집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책이다. 노은주ㆍ임형남 부부 건축가는,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하고,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소나기학교’의 기획을 맡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저자들은 집이 가족의 관계를 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과연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은주,임형남 저자의 집 이야기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범인은 흔적을 남긴다. 진실은 오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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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언어학? 그건 또 머야?

사실 법언어학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학문이다. 씁쓸하지만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비언어학 전공자들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분명한 것은 언어학의 한 분야라는 점이다.


동영상을 본 분들이면 법언어학에 대한 감은 잡았을 것이다. 즉, 법언어학은 범죄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사건현장의 단서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한다. 프로파일러나 과학수사에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해도 된다.

어떻게 해야 법언어학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법언어학과 관련된 이론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방법은 분명 한계가 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가상의 두 가지 사건을 법언어학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의문의 변사체>와 <사라진 내 아이>사건! 과연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까?

아래의 두 가지 사건은 모두 허구임을 밝힌다.

사건번호 392109-의문의 변사체

인적이 드문 한 공사장. 김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공사장으로 출근한다. 계속된 추가근무로 지칠 대로 지친 김씨는 공사장 한쪽에서 시체를 발견한다. Y그룹의 임원 손씨의 시체다. 그리고 시체 옆에는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다.

깜짝 놀란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몇 분이 지났을까?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다.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통제에 들어간다. 사건을 맡은 윤형사는 시체 옆의 편지를 꺼내 내용을 확인한다. 편지는 손씨의 유서 같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끝까지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먼저 떠나지만 슬퍼하지마.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 사랑해.”

윤형사는 현장근무자들의 탐문수사를 진행한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바로 그 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부인 주씨가 도착했다. 혼절하기 일보직전이다.

윤형사는 부인을 진정시킨다. 하지만 부인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자살에 무게를 둔 윤형사는 죽은 손씨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진다. 주씨는 한형사의 질문은 한 귀로 듣고 흘려 보낸다. 다음과 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

주씨는 “우리 남편은 절대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 어제 통화했을 때도 평소와 똑같았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다르지 않냐? 절대 자살이 아니다! 타살이다!” 고 주장한다. 주씨는 다소 감정에 복받쳐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어서 주씨는 “우리 남편은 지금까지 말을 할 때 ‘내가’라는 표현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부부 사이의 대화는 항상 존댓말을 썼다. 조작된 유서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Y그룹의 임원 손씨는 자살인가 타살인가?
사건번호 203950-사라진 내 아이

10년차 전업주부 미희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아침 준비가 끝나면 남편 출근 준비와 딸을 깨우기에 바쁘다. 아침은 항상 분주하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집 안이 조용해졌다. 미희는 평소에 즐겨 듣는 라디오를 켜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어제 남편과 크게 싸운 게 생각났다. 왠수같은 놈... 하지만 먼저 사과를 할 생각은 없다. 하소연이라도 할 생각에 단짝 친구 정미에게 전화를 건다.

정미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늦은 아침을 먹은 생각은 까맣게 잊은 듯 하다. 다이어트 결심도 함께 잊어버렸다. 이번에는 3일도 못 갔다.

탑처럼 쌓인 빨래를 보고 한숨을 내쉰다. 집안일을 할 시간이다. 부랴부랴 집안일을 시작한다. 어느덧 딸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간식을 준비하고 딸을 기다린다.

10분 20분…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딸은 아직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집밖을 나선다. 그 때 갑자기 양씨의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제한으로 걸려온 전화다.

“딸은 잘 있다. 딸을 찾고 싶으면 현금 5억을 준비해라. 만약 경찰에 알린다면 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않는다. 양씨는 딸을 찾을 수 있을지에 불안감에 떨고 있다.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 설마?

10년차 전업주부 미희는 범인을 잡고 무사히 아이들을 찾을 수 있을까?

증거 없는 사건은 없다! 법언어학을 통해 범인을 검거해보자.

과연 두 사건 모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까? 만약 범인을 검거했다면 어떻게 검거했을까? 물론, 각종 매체를 통해 위와 같은 범죄사건을 많이 접했다면 콧방귀를 낄지 모르겠다. 흔한 소재의 사건으로 쉽게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을 쉽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흔한 범죄사건이다. 다만 이번 두 사건을 법언어학의 접근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싶을 뿐이다. 최근 M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과 영화 <테이큰>은 사건 해결을 위한 좋은 예가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죽은 손씨의 말투를 생각하면 타살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의 한 장면에서 공기찬(양진우 역)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우마미(조윤희 역)는 남편 공기찬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주장한다. 드라마 속 여러 가지 증거들이 타살로 무게를 싣지만 주목할 부분은 공기찬이 우아미에게 보낸 문자다.


MBC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의 한 장면. 죽기 전에 우아미에게 보낸 공기찬의 문자.

우아미가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공기찬이 평소에 쓰는 말투다. 공기찬은 한 번도 자신에게 “자기야”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개개인마다 다른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아미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이처럼 평소에 쓰는 사람의 말투를 확인하여 사건이 실마리를 찾는 것이 법언어학이다.

두 번째 사건은 범인의 목소리를 추적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음성학의 측면에서 본 법언어학이다. 개개인마다 고유의 음성주파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범인의 목소리를 가지고 검거할 수 있는 것이다. 넘치는 부성애를 보여준 영화 <테이큰>의 한 장면이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자신의 딸이 괴한에게 납치당했다. 납치되기 전 딸과의 통화에서 범인에게 들은 한 단어 “굿 럭(Good Luck)” 브라이언(리암 리슨 역)은 전직 특수요원으로 딸과의 통화내용을 바탕으로 범인을 추격한다. 마침내 유괴범의 소굴이 도착하고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


범인에게 “굿 럭(Good Luck)”은 “배드 럭(Bad Luck)”이었다.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과 영화 <테이큰>의 사건해결 과정을 맨 처음에 언급한 두 사건에 적용하여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건 <사건번호 392109-의문의 변사체>
타살로 무게를 둔 이유는 유서가 평소 손씨의 말투와 부부간의 존댓말 사용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건 <사건번호 203950-사라진 내 아이>
사람들의 음성에는 고유한 주파수가 존재한다. 따라서 범인의 음성주파수를 확인하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

번외 경기 <Cuckoo’s Calling의 진짜 저자를 찾아라>

수많은 단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된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단어를 보고 사용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사용에 패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The Cuckoo’s Calling』의 저자를 찾는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한국에 번역되면 재빨리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범죄소설 『The Cuckoo’s Calling』은 Robert Galbraith의 저자로 출판되었다.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한 작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선데이타임즈의 한 기자는 『The Cuckoo’s Calling』의 저자는 J.K Rowling(해리포터의 저자)이라 생각했다. 그가 날린 트윗은 J.K. 롤링의 작품임을 확인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언어전문가들의 『The Cuckoo’s Calling』분석을 의뢰한다.

언어전문가의 분석이 J.K Rowling의 작품임을 확실시했다. 언어전문가들은 어떻게 『The Cuckoo’s Calling』이 J.K롤링의 작품임을 확인 할 수 있었을까?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J.K Rowling의 이전의 작품들과 비슷한 유사점을 발견했다. 비슷한 라틴어구의 사용과 장면의 설정이다.”

분석의 핵심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사람마다 다르게 선택한다는 점이다. 『The Cuckoo’s Calling』의 경우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라틴어로 사용했다. 인터뷰에서 J.K Rowling은 "비밀이 좀 더 오래 지켜지길 원했다" 말했다. 하지만 법언어학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한국에서의 법언어학

한국에서 법언어학이 관심을 받게 된지가 얼마 안 되었다. 한국에서는 미개척의 영역이다. 언어학의 하위분야에 해당이 되지만 한국에서는 관련된 연구가 거의 없다.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번역되어 출판된 책도 없다. 관련 서적이 턱없이 부족하다.


법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다.

결정적으로 법언어학과 관련된 학과가 없다. 적합한 커리큘럼도 없다. 대학원의 과정에서 이따금씩 다루는 경우가 전부다. 반면에 외국의 경우에는 법언어학과 관련된 전공이 개설되고 학회도 존재한다.

한국에서 미개척분야인 법언어학을 정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충분히 가치 있고 매력 있는 학문이다. 희망사항으로 관심 있는 학생들을 위한 개론서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능력 밖이다.

이번 학기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인지과학과 석ㆍ박사 과정에 ‘현대언어학의 동향’의 과목이 개설되었다. 강의계획서를 보고 법언어학을 다루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언어학을 공부하고 싶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청강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기회가 되면 강의실에서 저자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언어학으로 본 조지 오웰의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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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두 작품, 『동물농장』 과 『1984』

두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는 고전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어렵다.” “지루하다.” “책을 피고 읽다 보면 반드시 잠이 온다.” “시대와 뒤떨어 진다.” 등 이다. 이 외에도 다른 이유는 많이 있다. 고전문학을 보면 절대 풀 수 없는 수학문제를 보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단순히 수학이 싫다는 이유로 문과를 선택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전문학은 하나의 수학공식으로 생각했다. 내 스스로 ‘고전문학 = 어려운 수학문제’ 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지 오웰의 두 작품도 풀 수 없는 수학문제라 생각했다. 쳐다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일까? 『동물농장』은 구입하고 10년 동안 책장에 장식용으로 있었다. “나도 책 좀 읽는다.”의 과시용으로 구입한 것 같다.


『동물농장』 은 누구나 소장하는 작품 아니에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한 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다. 몇 페이지나 읽었을까? 고전문학의 편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숙성된 음식을 먹는 것처럼 깊이도 느꼈다. 왜 이제야 접했는지 후회도 들었다. 『동물농장』을 읽고 나서 『1984』를 읽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사회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한 빅브라더의 존재와 신어를 바탕으로 한 사전작업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언어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신어를 바탕으로 한 사전작업은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단어의 형성과 의미론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농장』보다 『1984』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근차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짧지만 강력한 한 줄의 힘 - 『1984』 의 슬로건

『동물농장』『1984』를 읽다 보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슬로건이 나온다. 슬로건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두 작품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대중에게 획일화된 사고체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두 작품 중에서 『1984』에 나오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을 살펴보자.


『1984』 에서 나오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1984』의 슬로건을 보면 무섭다. 대중의 사고는 당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당하고 있다. 전쟁을 합리화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알 권리도 박탈한다. 대중을 체스판에 있는 하나의 말이라 생각한다. 대중은 체스를 두고 있는 사람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1984』의 당의 세 가지 슬로건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다양한 슬로건을 접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슬로건이다. 하나의 슬로건이 후보자들의 당선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슬로건의 힘을 확인 할 수 있다. 당시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에 다시 찾아온 아침(It’s Morning Again in America)”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슬로건은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평론가들에게 사상 최고의 슬로건이라 극찬을 받았다. 슬로건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 준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의 대통령선거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새로운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의 슬로건은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두 슬로건 모두 민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러 가지 정치공학적인 이야기는 배제한다.)


박근혜대통령의 대선후보시절 슬로건.
내 꿈이 이루어지기에는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반면에 최악의 슬로건으로는 “Arbeit macht frei.” 를 생각할 수 있다. 번역하면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히틀러의 선전선동 책략가였던 요제프 괴벨스가 고안했다. 그는 이 슬로건을 유태인 수용소 입구마다 세웠다. 유태인은 슬로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1984』에서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은 대중의 사고를 획일화하여 통제한 측면에서 볼 때 성공적인 슬로건이다.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의 문장은 의미적으로 상반된 단어를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단순화시킨 단어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사고 또한 단순화 시킨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슬로건의 단어 ‘전쟁’은 공포, 두려움, 죽음 등으로 의미를 확장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을 평화라는 단어와 반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쟁’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의 확장을 막는다. 따라서 대중은 “전쟁 = 평화” 라는 단순한 사고패턴을 갖게 된다. 『1984』의 당의 슬로건의 형성과정은 철저하게 사고의 확장을 막고 단순화시키는 작업 인 셈이다.


신어로 사고를 통제한다 - 『1984』 의 신어의 사전작업

『1984』에서 슬로건과 함께 대중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은 신어다. 일반적으로 신어는 기존의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대체 혹은 확장의 필요성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면 줄임말, 은어, 속어가 해당된다. 하지만 『1984』신어의 목적은 다르다.

『1984』의 신어와 신어를 바탕으로 한 사전작업은 영사 신봉자들에게 부합하는 세계관을 심어준다. 사고 습성에 대한 표현수단도 마련해준다. 즉, 신어를 통해서 영사 이외의 다른 모든 사상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이단적인 표현할 수 없게 만든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사람들은 단어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속이란 단어를 생각한다면 감옥, 자유, 부인, 월급 등으로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의미의 확장은 또한 사고의 확장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신어를 만들고 대중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이다.


구속이란 단어는 단어의 확장뿐만 아니라 사고의 확장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주목 할 부분은 단어의 관계가 아닌 쓰임이다. 해당되는 단어의 쓰임을 제한하여 의미의 확장을 막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를 마치 문법화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free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free라는 단어는 “이 개는 이가 없다.”(“The dog is free from lice”), “책상 위에 연필이 없다.”(“There isn’t a pencial on the desk.”)의 예문처럼 단순히 존재의 여부에서 fre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정치적 자유(political free) 또는 자유로운 영혼(free soul)등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신어는 결국 의미의 확장과 쓰임을 통제함으로써 대중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 『1984』

예전 글에서도 언어와 사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언급했었다. 둘은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다. 작가도 이 점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1984』는 이 점을 확실히 표현했다. 대중을 슬로건과 신어로 통제하는 부분이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준 작품이다. 대한민국의 사회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했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도 재확인 시켜줬다. 만약 아직 읽지 못한 분이시라면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이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산, 왕비 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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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사에 우리나라의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 만큼이나 영화와 드라마, 소설로 많이 다뤄진 인물들이 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여섯 왕비들이다. 숙종이건 헨리 8세건, 이 남자들의 아내 갈아치우기와 처형에는 사랑과 변심 외에 다양한 갈등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입맛이 쓰다. 여자들의 궁중 암투나 부적절한 행실, 외모에 대한 언급과 희화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왜 책들은 남성 권력자의 문제점과 당시 상황보다 상대 여성의 문제점을 더 강조해 서술하는 것일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버림받을 만해서 버렸고, 죽일 만해서 죽였다’는 식의 서술이 말이 된다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헨리 8세의 초상화, 한스 홀바인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헨리 8세의 왕비들에 대한 서술이 부당한 이유

헨리 8세의 왕비들에 대한 부당한 서술, 그 이유는 역사, History가 말 그대로 His story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남성들이 기록한, 남성들이 활동한 이야기였다. 일부 상류층의 여성들의 삶만 아버지나 남편, 남자 형제, 아들과 관련하여 역사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도 남자들이 보는 입장에 따라서만. 그래서 헨리 8세의 첫 부인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에스파냐 공주, 영어로는 캐서린)은 아들도 못 낳은 주제에 고집불통 늙은 여자여서 이혼당하고, 마녀로 몰려 간통죄까지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둘째 부인 앤 불린은 끼가 넘쳐 남자를 홀리는 여자이고, 왕자 출산 후 사망한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순종적인 착한 아내이고, 결혼하자마자 이혼당한 넷째 부인 클레베의 안네(독일 클레베 공국의 공주, 영어로는 클리브즈의 앤)는 추한 외모 때문에 버림받은 신부이고, 간통죄로 처형당한 다섯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몸을 마구 굴린 철부지이고, 여섯째 부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먼저 죽었기에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들 한다. 이거 사실일까?

물론 작가들도 여성 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쓴 작가들은 당대에 기록된 역사적 문서들을 보고 썼기에 정확한 사실을 썼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사료에는 실제로 그렇게 서술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직접 보고 들은 후에 기록한 문서라고 다 옳은 기록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그녀들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사적인 생각을 말하고 썼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 편파적인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이럴 경우에는 작가의 바람직한, 약간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간 서술이 오히려 더 정확한 서술인 것 같다.


헨리 8세의 넷째 부인 클레베의 안네

헨리 8세와 관련한 여인들 중, 넷째 부인인 클레베의 안네의 경우는 특히 더 주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결혼 이전에 상호 교감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다가 헨리에게 꼬투리잡히거나 문제가 생겨 이혼, 혹은 처형당한 다른 부인들과 달리, 클레베의 안네는 얼굴을 보자마자 헨리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얼마나 못생겼으면 얼굴 보자마자 이혼당하느냐, 헨리가 얼마나 그녀의 못생긴 외모에 화가 났으면 결혼을 추진한 자신의 총신 토마스 크롬웰을 죽였을까’, 하는 식의 조롱거리로 부당하게 서술되곤 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처럼.


헨리 8세의 여섯 부인의 초상화 모음
그 후 재상 크롬웰은 헨리를 설득하여 루터파의 공주 앤(Anne of Cleves)과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교국의 동맹을 강화하자는 속셈에서였다. 그 여자가 도착하였을 때 헨리는 이 ‘플란더즈의 암말’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헨리는 크롬웰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크롬웰은 헨리가 마음대로 움직여 온 나라의 건축기사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처형되고 말았다. 아울러 앤은 이혼당하였다.-「영국사 1(p.163), 해롤드 술츠 저」

홀로 된 헨리를 위하여 크롬웰은 1540년 1월 클리브즈(Cleves)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클리브즈(클레베)는 플랑드르 지방에 있는 루터파의 작은 공국이었는데, 크롬웰은 이 결혼을 통해 개신교 세력과의 동맹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혼식은 치렀지만, 이른바 이 ‘플랑드르의 암말’을 보고 기겁한 헨리는 신방에 들기를 거부하고 결국 결혼을 무효화했다. 이 일로 해서 크롬웰은 헨리의 분노를 사 십 년 권좌에서 쫓겨났고 그의 권력을 시기한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그해 7월에 마침내 목이 잘리고 말았다.-「영국의 역사 上(p.291), 나종일ㆍ송규범 공저」

헨리는 앤에게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육중한 몸매와 늘어진 피부에 혐오감을 느껴 그녀를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잠시동안 그녀와 같은 침대를 쓰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헨리는 구실을 만들어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튜더스(p.400), C.J. 마이어 저」
클레베의 안네의 결혼과 이혼 과정이 기존의 영국사 책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위의 세 책을 통해 알아 보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약과다. 흥미위주로 서술하는 대중 역사서의 경우, 아래와 같이 희화화된 서술도 흔하다. 심지어 미술 관련 책에도 홀바인이 그린 안네의 초상화와 관련하여 그런 서술이 보인다.
다음은 클레베스의 앤, 일명‘ 플랑드르의 암말’ 차례가 되었다. 비록 그녀가 눈에 띌 정도의 추녀이긴 했지만 이 결혼은 정치적인 견지에서 좋은 아이디어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결혼은 앤이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라고 느낀 헨리가 이혼을 요구함으로써 둘의 짧은 결혼 생활도 끝이 났다. 크롬웰은 애초에 이 결혼을 꾸민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불쌍하게 난도질을 당했다. 친구 잘 되라고 호의를 베풀다가 억울하게 봉변을 당할 때가 가끔 있는 법이다.-「유머러스 영국 역사(p.97), 존 파머」

클레베의 안네 초상화, 한스 홀바인 그림

이렇듯 정통 역사서이건 대중 역사서이건, 헨리 8세의 네 번째 이혼 이유로는 클레베 공국의 공주인 안네의 추한 외모가 주로 거론된다. 안네의 외모에 실망한 헨리 8세가 그녀를 ‘플랜더즈의 암말(Flanders mare)’이라고 불렀다고는 하나, 이는 이혼하고 싶어하는 헨리가 한 말이었다. 이를 당대의 주위 사람들이 듣고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 ‘플랜더즈의 암말’이란 표현을 후대인인 우리까지 안네를 평가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헨리는 새 신부를 처녀로 남겨 두며 침대를 같이 사용하기만 한다.다. 그리고 안네의 암내가 심하다며 투덜거린다. 암내란 근접한 거리에서나 맡을 수 있는 것, 안네의 암내는 헨리만 맡고 헨리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헨리 다리의 종양에서 풍기는 고름내는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맡을 정도로 심했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당시 49세로 네 번째 결혼에 나선 비둔하고 썩은 고름내 풍기는 헨리를 늙은 신랑으로 맞은 25세의 새신부 안네는 과연 그에게 만족했을까? 왜 책들은 안네의 입장에서 그들의 결혼과 이혼을 서술하지는 않고 그녀가 못생기고 암내 풍겨서 버림받은 신부였다고만 기록하는 것일까? 이혼 이후 안네는 일반적인 영국 통사를 다룬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안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버림받은 신부로, 평생 불행하게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살았을까?

클레베의 안네는 현재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 지역에 있던 클레베 공국의 공작 요한 3세의 두 번째 딸로 태어났다. 안네와 헨리 8세의 결혼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 에스파냐에 맞서 개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에 따른 정략 결혼이었다. 당시 공주들은 외교적 실익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이었다. 상대가 이혼과 아내 처형으로 악명 높은 헨리 8세였지만, 아버지 사후 공작 지위를 계승한 그녀의 남자 형제, 엄격한 신교도인 빌헬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안네는 예비 신랑의 과거에 크게 개의치않고 외국에서의 새출발을 꿈꿨다고 한다.


안네가 결혼 전 살던 클레베의 슈바넨부르크(백조의 성, Schwanenburg)

그러나 1540년 1월. 신부인 안네를 처음 보자마자 신랑 헨리는 크게 실망했다. 한스 홀바인이 그려온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고 화를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당장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는 없었다. 국가간의 결합이라, 모욕감을 느낀 클레베 공작 빌헬름이 전쟁을 선포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헨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형식적인 동침을 계속하면서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에게 새 왕비에 대한 불만을 말한다. 그러나 크롬웰은 외교적 이익만을 이야기하며 안네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하라고 권하여 점차 헨리의 총애를 잃어간다. 안네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교육을 받았고 정숙했지만 아직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헨리의 전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나 앤 불린에 비해 지적 교양과 재치가 부족했다. 아마 재기발랄한 여자들을 좋아하던 헨리에게 외모보다 이 부분이 더 매력없게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헨리의 다음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와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에 비해 안네의 외모가 더 나았다는 다른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를 못해서 겉으로만 어둔하게 보였을뿐, 안네는 실제로는 영리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아차리자마자 언행에 신중을 기했다. 헨리 뿐만 아니라 왕의 새 왕비에 대한 마음을 읽고 이번 기회에 왕의 환심을 사고자하는 궁정의 귀족들에게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미 왕의 관심은 자신의 시녀인 10대 소녀 캐서린 하워드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네는 헛된 기대를 버린다. 이혼을 거부하고 명예를 추구하다 유폐된 첫 왕비 카탈리나도, 이미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사랑이 식은 남편에게 마녀로 몰려 간통죄까지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처형당한 둘째 왕비 앤 불린도 되지 않겠다고 안네는 다짐한다.


영리했던 안네

한편 헨리는 이혼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종교개혁까지 하며 첫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할 때와 달리 이 시기는 이미 왕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었기에 교황청의 허가를 받을 일도 없다. 성적 결합이 없었기에 안네만 동의하면 이혼이 아니라 혼인 무효로 돌려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문제는 안네의 친정인 클레베 공국과의 전쟁 가능성이었다. 헨리는 안네가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고자질하고 클레베 공작 빌헬름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킬 것을 걱정, 안네에게 오가는 편지들을 뜯어 조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네는 지혜롭게도 영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내용만을 편지에 써서 친정에 보낸다. 자칫,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갇혔다가 처형당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긴장 속에 반년이 흐른다. 안네는 이혼을 원한다는 내색도 먼저 보일 수 없었다. 헨리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또한 위험했기 때문이다. 안네는 자신이 매력적인 왕을 몹시도 원하고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허영심은 왕에게 심어주면서,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혼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7월 11일에 안네 왕비는 추밀원의 요청에 따라 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을 공식인정했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힘겹고도 슬픈 일이지만 최고로 존귀한 왕에게 품은 큰 사랑으로 이혼 판결을 인정한다고 확언했다. “판결 결과와 폐하와의 지고지순했던 결혼생활을 고려해서 스스로를 폐하의 아내로 여길 수도 없고, 또 그러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그러면서도 폐하의 고귀한 존재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폐하가 절 누이로 여겨주시는 것에 만족하며 겸허히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뒤에 마지막으로 서명을 했다. “폐하의 미천한 여동생이자 종이며 클레브스 공국의 공주인 안네로부터.”
사실 이 외교술의 걸작품은 추밀원에서 치밀하게 계산해서 짜낸 작품이다. 확인 편지로써 혼인 무표 판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 왕비가 상실감에 젖어 있음을 암시해서 왕을 기분좋게 만들어준 것이다 안네는 예상과 달리 이혼으로 인해 그리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굴욕적인 결혼의 덫에서 벗어나 난생 처음으로 홀로 서는 온전한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헨리 8세와 여인들 2(pp.162~163), 앨리슨 위어 저」


1540년 7월 12일, 안네와 헨리 8세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었다. 안네는 이혼 후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the King's Beloved Sister)’이 되어 켄트 지방에 있는 히버 성을 비롯한 영지와 후한 연금을 받고 영국에 정착한다. 이후 안네는 왕의 재혼을 열렬히 찬성하여 두 왕비와 친하게 지내고 왕실 행사에 가족으로 존중받으며 참석하고, 헨리 8세의 자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비슷한 나이 대의 메리(헨리 8세와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 태어난 딸)와는 친구처럼 지냈다. 살아남은 왕비 안네는 헨리가 다섯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하는 것도, 한때 형식적 신랑이었던 헨리 8세의 죽음도, 여섯째 왕비 캐서린 파의 죽음도,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죽음도, 9일 여왕이었던 제인 그레이의 처형도 다 목격한 튜더 왕가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 1553년 10월 메리 1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안네는 재혼을 하지도, 친정 모국인 클레베 공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전원 생활을 만끽하다가 1557년 첼시에서 사망한다. 마흔 두 살 생일 몇 주 전이었다.


드라마 <튜더스>중 클레베의 안네 역을 맡은 배우 사진

물론 안네의 생존 이유에는 안네의 지혜로운 처신뿐 아니라 여러 상황이 같이 얽혀 있었다. 안네는 첫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마찬가지로 공주 신분이었다. 헨리는 자신의 신하의 딸인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처럼 안네를 쉽게 처형할 수는 없었다.

당시 영국 궁정 내의 권력 암투 상황도 안네에게 유리했다. 헨리 8세의 총신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앞서, 불린가의 권력을 빼앗고자 둘째 왕비 앤 불린의 처형에 적극적으로 나선 바가 있다. 그런데 이번 안네와의 결혼은 크롬웰 자신이 신교도 국가 동맹을 위해 주선했기에, 크롬웰은 헨리에게 동맹의 유익함을 설득하며 안네와의 결혼 유지만을 권하게 된다. 이에 헨리의 불만을 알아 차리고 다음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를 내세워 권세를 얻고자하는 노퍽 공작 토마스 하워드의 공격에 의해 토마스 크롬웰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엄격한 개신교도인 크롬웰은 당시 프랑스 내 영국의 영토였던 칼레에 개신교도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헨리에게 발각되자 분노한 헨리는 크롬웰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도록 놔 둔 것이다.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에게서 독립하는 종교개혁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성립한 영국 국교회의 교리는 개신교보다 카톨릭에 가까웠다. 헨리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그밖에 헨리 8세가 영국의 종교 개혁 중 압수한 수도원의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형성된 불만을, 이 일을 맡아서 한 크롬웰을 희생양 삼아 해결하려 했던 이유도 크롬웰 처형의 한 이유였다. 국제 정세도 마침 카톨릭 국가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굳이 클레베 공국과 동맹을 유지할 필요도 없어졌기에 신교도 국가와의 동맹을 내세운 크롬웰의 결혼 권고는 이제 가치가 없어졌다. 이렇게 살펴보았을 때 앞서 인용한 대중 역사서에 서술되어 있듯, 크롬웰의 처형이 단순히 못생긴 신붓감을 잘못 주선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해석은 안네 외모의 추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편견만을 독자에게 조장할 뿐이다. 여하튼, 만약 크롬웰이 안네에게 실망한 왕의 마음을 알자마자 앤 불린 때처럼 얼른 왕비를 제거하는 음모 실행에 나섰다면, 아마 안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안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결혼과 이혼을 통한 헨리 8세의 속셈

안네와의 이혼 이후 헨리의 다섯째 왕비가 된 캐서린 하워드를 제거할 때는 하워드 집안의 권력을 노리는 크랜머가 공격에 나선다. 이렇게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 소동에는 영국 내 권력자들간의 암투와 국제 정세가 얽혀 있었다. 그리고 헨리는 이를 이용해 의회와 귀족, 신학자와 법률가들을 길들이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구축한다. 결코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 소동은 헨리의 사랑 놀음이나 여인들의 외모나 성격, 품행의 문제로 일어난 단순한 희비극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숙종 시기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중전 자리 다툼에 서인과 남인 세력 다툼과 이를 왕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의 속셈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안네의 삶을 읽을 때에는 헨리 8세가 실제로 말한 ‘못생긴 플랑드르의 암말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안네에 대한 평가로 기록된 역사서보다, 저자의 의도가 많이 들어간 허구의 역사 소설을 통해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안네의 ’사실적인 모습‘을 접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닐까. 물론 그 허구는 여러 사람들이 서술한 1차 사료들을 가지고 다각도로 접근해서 재구성한, 진실에 근접하고 정당한 허구여야만 한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내가 읽은 책들 중 안네에 대해 가장 호의적으로 서술한 소설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혼 후에도 늘 언행을 조심하며 살던 안네가 헨리 8세 사망 후 독백하는 부분이다.
나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과거에 헨리의 칼날만 피할 수 있다면 내 뜻대로 내 인생을 살겠노라고, 정당한 권리를 지닌 여자로서 세상에서 내 몫을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이제 자유로운 여자다. 그에게서도, 그리고 마침내 공포에서도 해방되었다. 이제 누군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더라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떨지 않을 것이다. 낯선 사람이 집에 찾아와도 왕이 보낸 첩자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궁정 소식을 물어도 혹시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고양이를 키울 것이고 나를 마녀라고 해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춤도 출 것이고 헤픈 여자라 불릴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달려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것이다. 흰 바다매처럼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나만의 삶을 즐기며 살 것이다. 자유로운 여자가 될 것이다.
여자에게 자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불린가의 유산 2(p.311), 필리파 그레고리 저」
위의 소설에서 클레베의 안네는 지혜롭게 살아남아 당시 귀족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자유를 누린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인 <불린가의 유산>은 중의적이다. 실제로 안네는 이혼이 댓가로 히버 성을 영지로 받는데, 그 성은 원래 불린 가의 소유였다. 앤 불린은 히버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네가 앤 불린의 삶에서 얻은 교훈만이 불린가의 유산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안네와 앤, 둘은 이름도 같다. 하지만 인생의 끝은 판연히 다르다. 프랑스에서 배운 세련미와 밀당 기술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가 된 후 아들을 못 낳자 처형당한 앤, 그리고 다른 왕비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어 왕비 자리를 내놓고 자유를 얻은 안네.


앤 불린이 어린 시절을 보낸 히버 성. 클레베스의 안네가 영지로 받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누군가는 안네의 삶을 보고, 이런 것이 뭐가 지혜로운가? 남자 권력자의 비위를 맞춰주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을 뿐 아닌가? 그런 점에서는 다른 왕비들과 같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혼 이후 안네의 삶을 보면 그녀는 정말로 앤 불린을 비롯한 다른 왕비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안네는 자유를 얻었다

그녀는 친정 나라로 돌아가서 다른 외교적 목적을 위한 정략 결혼에 재활용당하지 않았다. 이 점은 혼인 무효와 사별 후 고국에 돌아가 다시 정략 결혼을 거듭한 다른 귀족 여성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안네는 영국에 남아 스스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전원 생활에 행복을 느꼈다. 또, 그녀는 헨리 8세 사후 그녀의 재산과 지위를 탐내는 남자들이 접근해도 재혼하지 않았다. 이 점은 나이 많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해서 어린 나이에 이미 두 번 과부가 된 후 헨리 8세와 세 번째로 결혼한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와도 달랐다. 당대의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손꼽히던 그녀는 헨리 8세 사후 그녀의 지위와 재산을 이용하여 권력을 획득할 욕망에 눈먼 토마스 시모어와 네 번째로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의 배신으로 괴로워하며 아이를 낳은 후 35세에 사망했다. 안네는 이 모든 삶을 생생한 역사로 다 목격하고 헨리 8세의 아내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 남았다. 나는 궁금하다. 그녀는 과연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 한 번의 결혼에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클레베의 안네, 이 언니를 보라. 정략 결혼에 이용당할 작은 공국의 공주로 태어나 전 왕비이자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살다 죽은 여자, 이 언니를 보라. 그녀는 남성 권력자들의 장기판의 말로 살아갈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살았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 운명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는 게임에서 내가 엑스트라 역할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들이 나에 대해 이미 부당한 결론을 내려놓고 멋대로 나의 가치를 낮춰 말할 때, 클레베의 안네, 이 언니가 살아간 방식을 보라.

그리고 어차피 질 게임, 난 니들이 정한 규칙대로 게임하느니 차라리 안 할거야,라고 조용히 외치고 마음 속에서 장기판을 엎어 버려라. 그리고 훌훌 털고 당신이 원하는 길을 가라. 사람들은 그런 여자들을 못생겼다느니 별나다느니 그래서 버림받았다느니 맘대로 말하겠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클레베의 안네, 남들이 정한 대로 살지 않는 삶에도 여자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 언니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버림받은 여자가 불행하다는 것, 그건 장기판의 졸로 평생 살아가다 죽는, 그런 용기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말이니까. 그러나 우린 내 인생이란 장기판의 영원한 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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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위해 공주가 아닌 여전사가 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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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는 한 장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아래 그림을 보자. 한 눈에 보기에도 중세 유럽 스타일로 보이는 이 그림.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눈에 많이 익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 그림은 중세 유럽사의 ‘카노사의 굴욕’이란 항목에 참고자료로 자주 실리는 그림이다.


‘카노사의 굴욕’에 등장하는 교황이 교황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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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장면. 도니초의 <Vita Mathildis>에서. [출처: 위키피디아]

이 그림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왼쪽 아래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는 남자는 하인리히 4세 황제다. 왕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왼쪽 위, 편안한 의자에 앉아 중재의 손짓을 보여주는 인물은 클뤼니 수도원 원장인 후고다. 수도사 복장과 지팡이를 통해 그가 종교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안에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황제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노사 성에 가서 3일 동안 빌어 간신히 용서받았다는 역사대로라면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여야 한다. 그런데 다시 보자. 성 안의 고귀한 인물은 여자의 두건을 쓰고 있다. 교황이겠지 생각하며 대충 보고 지나갔던 이 인물은 교황이 아니었다. 이 인물이 교황이라고 잘못 표기한 책도 많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이 언니가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Matilde, la Gran Contessa della Tuscany)다.

마틸다는 11세기 중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의 영주인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체의 딸로 태어났다. 북 로렌 공작의 딸인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이종사촌간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마틸다 외에 프레데릭과 베아트리체라는 아들과 딸이 더 있었다. 마틸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몇 번째 아이인지에 관해서는 자료마다 의견이 다르다. 확실한 것은, 보니파체 후작과 베아트리체 사이에 태어난 자녀 중에서 마틸다만 살아 남아 부모의 영지와 지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마틸다가 어린 아이였을 때, 야심을 품고 정복 사업에 나선 아버지 보니파체 후작이 암살당한다.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광대한 영지를 탐내는 영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정 아버지 쪽 친척인 남 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와 재혼한다. 마틸다도 고드프리 3세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고드프리 4세와 약혼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후에 마틸다도 그와 정략결혼하게 된다. 베아트리체과 고드프리 3세의 결합은 광대한 두 영지의 결합이었기에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분노한다. 게다가 이탈리아 국왕 자리를 노리는 고드프리 3세는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독일 영토를 잠식하고 북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이를 벌하고자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한다. 고드프리 3세는 자신의 고향인 로렌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원래 토스카나 지역이 근거지인 베아트리체와 아이들은 영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베아트리체는 남편 대신 용서를 빌기 위해 하인리히가 궁정을 연 피렌체에 죄인의 복장을 하고 찾아간다.

베아트리체는 맏딸 마틸다를 데리고 피렌체에 머물고 있는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마틸다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소녀였지만 그 날의 치욕을 평생 잊지 못했다. 어머니는 백작 부인의 화려한 의상을 버리고 죄인이 입는 누추한 베옷을 몸에 걸친 채 황제의 어전에 엎드려서 남편의 악업을 사죄했다. 그녀는 부당하게 확대한 영지의 반환을 맹세하며 옛 영토의 보전을 애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냉담하게 그 호소를 물리치며 모녀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서 독일로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여정을 더욱 고달프게 하려는지 슬픈 소식이 뒤쫓아 전해졌다. 카노사 성에 남겨 두고 온 아들과 둘째 딸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사인이나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황제의 명령으로 살해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고, 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맹세했다.-「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pp.61~62) 후지사와 미치오 저 | 일빛」


마틸다, 공주가 아니라 여전사가 되다

이 장면은 22년 후인 1077년에 마틸다 일가의 주성인 카노사에서 등장 인물만 바뀌어 재현된다.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와 베아트리체의 딸인 마틸다 사이에서. 아니, 재현되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토스카나의 새로운 영주가 되어야 하는 마틸다의 존재 이유였다. 그녀는 장차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녀는 복수를 위해 남자들 틈에서 이를 악물고 군사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얌전한 공주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전장을 달리는 여전사로 성장했다.


파르미지아니노가 그린 마틸다의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일년 후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한다. 그의 6살 난 어린 아들이 하인리히 4세가 되어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했다. 황제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당시는 왕조를 향한 충성심보다 영주 개인의 역량과 현실적인 군사력이 중요한 시기였기에 어린 하인리히 4세의 영향력은 아버지 대에 비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그 기회를 노리고 고드프리 3세는 토스카나와 로렌의 소유권을 다지며 자신이 도망간 사이 하인리히 3세 편을 들었던 도시들을 무력으로 응징한다. 또 자신의 동생을 스테파누스 9세 교황으로 만든다. 자신이 이후에 이탈리아 왕이 되었을 때, 교회측의 승인을 쉽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때부터 마틸다 가족과 교회와의 관계는 친밀해졌다. 그러다 1069년 고드프리 3세는 세상을 떠난다. 베아트리체는 다시 과부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재혼하지 않고 교황청의 실력자인 클뤼니 수도원 출신 힐데브란트를 지원하며 그에게 의지한다. 마틸다 역시 신앙심이 깊었기에 개혁파 힐데브란트를 영혼의 아버지로 여겼다.

마틸다는 의붓오빠인 고드프리 4세와 결혼했다. 그는 딸을 낳은 후 자신의 영지인 로렌을 통치하기 위해 돌아갔지만 마틸다는 자신이 물려받은 토스카나의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남았다. 이것이 부부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후에 마틸다는 교황에게 부탁하여 고드프리 4세와 이혼한다. 1076년, 어머니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딸도 어린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갔다. 마틸다는 더욱더 신앙과 힐데브란트, 아니 이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한편 교회 개혁에 솔선수범하고 마틸다의 적인 황제에 맞서는 그레고리우스 7세는, 어려서부터 고난을 겪고 신앙에 의지하며 복수를 위해 살아온 마틸다의 이상을 충족시켰다. 교황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는 하인리히 4세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무력 지원이 필요했다. 교황은 토스카나 시골 출신인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에 마틸다의 어머니인 베아트리체가 도와준 사실을 인간적으로도 잊지 않았다.



마틸다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영지와 카노사 성의 위치 [출처: 위키피디아]


황제냐 교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마틸다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그녀의 정치적 선택과 상관없이 황제의 영토와 교황의 세력권 사이에 운명적으로 위치해 있었다는 것. 황제냐 교황이냐, 선택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마틸다는 어릴 적 어머니가 겪었던 치욕을 잊지 않았기에. 마틸다는 흔쾌히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었다. 그녀의 병사들은 전투에 앞서서 이렇게 외쳤다. “마틸다와 성 베드로(교황을 의미함)를 위하여!”

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과 축첩을 금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성직자 집단 내부의 도덕적 정화작업을 펼쳤다. 이어서 황제의 성직자 서임권을 철폐하고, 교황 중심으로 서유럽 전체를 통일한 후 십자군을 일으켜 셀주크 투르크 족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으려 했다.

최종적으로 그레고리우스는 신정정치를 꿈꾸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하신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결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없다. 주교를 해직하거나 복직시키고, 새로운 법이나 주교직을 설치하고 오래된 교구를 분리하거나 주교들을 인사이동하거나,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황제를 폐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교황뿐이다. 그러므로 군주들은 그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하고 교황의 사절들은 주교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기독교의 역사(p.357) 폴 존슨 저 | 포이에마」

한편, 이 시기 어린 하인리히 4세 역시 차근차근 성장하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자연 황제보다 우위에 선 신정정치를 꿈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1076년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대주교의 지위는 세속적으로 보면 영지가 딸린 백작에 해당한다. 자기 편 사람을 임명하는 권리는 교황이건 황제이건 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권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지역의 주교들을 모아 교황의 폐위를 선동했으며, 폐위 통지서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7세는 자신의 폐위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주교 전원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파문(破門, excommunication)이란 세례받은 신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처벌이다. 파문되면 장례 미사도 치르지 못하고 교회 묘지에 묻힐 수도 없기에 죽어서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이교도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신이 주신 모든 지위와 권리가 박탈당하기 때문에 파문당한 자에게는 복종할 의무도 없다. 독일 지역의 영주들 중에서는 황제의 파문 소식을 듣고 오히려 거리낌없이 자신의 주군을 공격하여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어 기뻐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때는 아직 독일 통일 훨씬 이전 시대다. 황제는 독일 지역 수많은 영주 중의 하나였으며 세습이 아니라 선출로 제위에 올랐다. 그런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독일의 영주들은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교황을 지지했다. 황제를 지지해 온 주교들마저 파문 선고에 겁먹고 교황에게 항복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주재 아래 1077년 2월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종교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때까지 교황에게서 파문을 해제받지 못하면 후임 황제를 선출할 것이라는 통보를 보냈다.

통보를 받고 고민하던 하인리히 4세는 군사를 동원하는 대신 교황과 직접 교섭하기로 마음 먹고 교황이 있는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교황은 이미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난 뒤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도중에 카노사 성에서 머무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카노사로 향했다. 카노사 성이 있는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은 마틸다의 영지였다. 마틸다는 미리 키노사 성에 가서 하인리히 4세를 기다렸다.


당시의 카노사 성을 그린 그림 / 현재의 카노사 성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패배를 자인한 하인리히 4세는 사면을 구걸하기 위해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향했다. 그가 알프스를 넘을 무렵 교황 일행도 아우크스부르크를 향해 북행하고 있었다. 교황과 황제는 1077년 1월 21일 알프스의 카놋사 성에서 만났다. 황제는 참회자답게 맨발에 거친 옷차림으로 꼬박 3일 동안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애걸했다. 1077년의 알프스 산악지대는 중세 전체를 통해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것도 아닌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렇게까지 비굴할 수가 있는가? 1636년 청나라에 패한 인조가 한강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조에게 무릎을 꿇은 굴욕이 떠오른다. 교황은 참회를 받아들여 황제를 사면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일을 '카놋사의 굴욕'으로 기록한다.-「초기 기독교 이야기(p.55) 진원숙 저 | 살림출판사」


마틸다, 마침내 복수하다

마틸다는 맨발로 누추한 털외투만 걸치고 성문 밖에서 용서를 비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황후 베르타와 어린 아들이 함께 서 있었다. 아마 마틸다는 22년전 어머니와 어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침내 어머니와 형제들의 복수를 한 것이다. 마틸다의 종군신부였던 도니초가 영웅 서사시 형태로 1115년에 완성한 <Vita Mathildis>에 의하면, 이때 하인리히 4세는 육촌누나인 마틸다에게 “나의 사촌 누이여, 그대가 나를 위해 변호를 해 주오.”라며 마틸다에게 애걸했다고 한다. 물론 그 역시 속으로는 언젠가는 이 치욕을 꼭 갚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 성문 밖에서 금식하며 버티기를 3일째, 드디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교황은 그를 미사에 참석시켜 파문을 거둬들였다.


카노사 성 밖에 맨발로 서 있는 하인리히 4세 / 하인리히 4세의 가족들 [출처: 위키피디아]

이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영원한 승리였던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교황과 황제간 대결의 최종 승리자는 황제였다. 파문이 취소된 후 근거지로 돌아간 하인리히 4세는 반격에 나선다. 그는 독일 내 영주들의 지지를 모아 곧 세력을 회복한다. 한편 교황의 사면이 불만이던 황제 반대 세력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로운 독일황제로 선출했다. 전쟁이 벌어졌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루돌프를 지지하며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루돌프는 전사했다. 하인리히 4세는 황제파 주교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클레멘트 3세를 대립(對立) 교황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복수를 위해 황제군 중 일부는 카노사로 향했지만 마틸다는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켰다.

로마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도망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정식 대관식을 치른다. 그때,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얼마 안 떨어진 성 안젤로 요새로 피신해 있었다. 4년 동안의 농성 후에야 그는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노르만 족의 도움으로 요새를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족 군대의 약탈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쫓겨, 그레고리우스 7세는 노르만 군대와 함께 로마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에서 또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지만 아무 효력이 없었다. 1085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쫓겨간 살레르노에서 사망한다. 영원의 도시, 성 베르드로의 도시 로마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채.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싸움에서는, 하인리히가 이겼다.

마틸다 역시 하인리히 4세의 복수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다. 황제군과의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끈질기게 반 황제 선동에 나서서 반란을 배후조종했다. 심지어 하인리히 4세의 두 아들 콘라트와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를 배신하도록 사주하기도 했다. 1106년, 아들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안고 하인리히 4세는 세상을 떠났다. 하인리히 4세와 마틸다의 싸움에서는, 마틸다가 이겼다. 이제 마틸다의 복수는 끝났다. 마틸다는 그 후 10년을 더 살다 1115년 카노사 성에서 숨을 거둔다. 황제에 대항하며 영지를 지키고, 교황을 위해 싸운 한 평생이었다.

생전에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가 추대한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에 맞서 새로운 교황으로 빅토르 3세를 옹립했다. 그가 사망하자 개혁파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주교를 새 교황으로 지지했는데 바로 이 교황이 후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우르바누스 2세이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과오는 논외로 하고, 여하튼 마틸다가 숭배하던 그레고리우스 7세가 간절히 원하던 사업이, 그녀가 옹립한 그의 계승자를 통해 실현된 셈이다.

교회는 그녀가 영면한 카노사 성이 마틸다 사후 100년 경에 파괴되자 1635년에 그녀의 무덤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왔다. 현재 우리가 보는 마틸다의 무덤은 바로크 조각가인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만든 것인데, 관 정면에 ‘카노사의 굴욕’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는 마틸다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자 업적인 ‘카노사의 굴욕’에서 그녀가 중심 인물이었으며, 교회는 마틸다의 기여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사후 600년이나 지나 이런 무덤을 조성해 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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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가 만든 마틸다 무덤 조각.
무릎 꿇고 교황의 발에 입 맞추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석관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와 오토 대제 이후 당연시 여기던 알프스 너머 황제들의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계기로 본다. 독일인들에게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황제가 사라지고 교황의 실질적 지배도 사라진 오늘날에까지도 ‘카노사로 가다(nach Canossa gehen)라는 말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 쓰이는 숙어라고 한다.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카노사의 굴욕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독일 대표단의 성좌(聖座) 파견 문제를 놓고서, 1872년의 독일 제국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연설’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을 것이다. (Nach Canossa gehen wir nicht.)”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좋아했던 비스마르크는 이후에도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당시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팔크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교황의 역사(p.143) 호르스트 푸어만 저, 차용구 역 | 도서출판 길」

이렇게 유럽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마틸다는 그저 복수에만 눈먼 전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전에 종교 기관을 후원하여 교회, 수도원 등 종교 기관에 자신의 토지를 기부했다. 당시의 교회나 수도원은 학문 기관이자 지역사회 복지기관도 겸했으므로 마틸다의 기부는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선행이었다. 후계자 없이 사망한 마틸다의 영지는 교황의 직할령이 되었다. 한때 마틸다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는 이제 피렌체, 루카, 피사, 볼로냐 등 자치 도시들이 번성한다. 이 마틸다의 도시들에서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볼로냐 대학은 마틸다가 후원한 교회법 연구 기관이 그 모태이기도 하다. 지금도 볼로냐에 가 보면 이 대학도시에 기여한 마틸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꽤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마틸다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나


현재 성벽만 남은 카노사 성 / 성벽의 부조 [출처: 위키피디아]

게다가 그녀는 현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보기에도 강한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다. 부모의 이른 사망으로 대영지의 상속녀가 되어 주위 세력의 암투와 전쟁에 휘말린 공주들은 역사에 많다. 그러나 마틸다처럼 자신의 운명을 무기를 들고 스스로 개척한 강인한 여성은 드물다. 고드프리 4세와 이혼 후 벨프 집안의 어린 소년과 정략결혼을 한 번 더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두 번 다 이혼하여 남편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 교황에게 의지했다고 하나 그건 정신적인 의존이었다. 그녀는 남자 뒤에 숨지 않고 군사력이 없는 교황을 대신하여 싸움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존경하는 남자를 보호했다. 스스로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가 병사들의 자발적 지지와 복종을 받아냈다. 잔인한 정복과 학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영주들은 모두 그랬다. 그 시절의 그들은 관료를 두고 문치에 나서는 태평성대의 군주가 아니라 실질적 무력으로 다스리는 일종의 군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이기에 유독 그녀의 잔혹함이 더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없다.

토스카나의 마틸다, 이 언니를 보라.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두 세력권 사이에 낀 북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원치 않았으나 운명적 싸움에 휘말린 여자. 그러나 운명의 중심이 되어 스스로 싸워나간 여자. 이 언니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언니를 보라. 인간은 누구나 랜덤으로 태어난다. 자신이 태어날 시대와 공간, 가족과 환경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이상, 자신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랜덤이 아님을,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임을 이 언니는 전 생애를 걸쳐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니 마틸다, 이 언니를 보라. 더 이상 운명이, 상황이 주는 것들을 랜덤으로 받지만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자. 상황을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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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해밍턴에게 군대식 용어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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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관 속 유창한 한국어실력의 외국인은 어떻게 한국어를 접했을까?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면 먼저 입에 마비가 온다. 20년 가깝게 영어공부를 했지만 아직까지는 “I’m fine thank you, and you?’의 수준이다. 가끔 “저 한국말 잘해요.”라고 말하는 외국인을 보면 그들의 제2의 외국어습득 능력이 부러워진다. 그들은 어떻게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을까? 브라운관을 사로잡은 대세남 ‘샘 해밍턴’의 일화를 살펴보자.

9월 25일 방송된 tvN <섬마을 쌤>에서 샘 해밍턴과 샘 오취리가 한국을 접하게 된 사연이 소개 되었다. 그들은 한국이란 나라보다는 북한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샘 오취리는 한국과 중국을 혼동했으며 한국에 오기 전에 사극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극에 무대가 한국의 현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장금이가 대통령에게 음식을 주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 이다.

샘 해밍턴의 일화는 많은 방송을 통해서 소개되었다. 그는 대학교시절 한국어를 복수전공 했다.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을 했다고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스펙 관리의 열을 올리는 것 같았다. 한국어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하고 고려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아온 샘 해밍턴. 그의 에피소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클럽에서 여자를 꼬시기 위해 한국말을 구사하는 샘. 개그콘서트에서 특채로 활동한 개그맨 샘. 이후 한국생활을 포기하고 떠나려는 찰라 터진 예능감.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로버트할리를 밟고 올라가고 싶다”라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 MBC <진짜 사나이>를 통해서 이제는 그의 포부를 이룬 것 같다.


샘 헤밀턴에게 군대식 용어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출처: MBC 진짜사나이]


전통혼례를 하고 호주방송에서 인터뷰를 한국어로 하는 샘 헤밍턴의 모습을 보면 성공을 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는 내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진다. 샘 해밍턴의 유창한 한국어실력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한국을 사랑한 이유? 살기 위한 생존 무기로 필요한 도구? 다양한 이유를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만이 갖는 언어적 특징과 문화의 이해가 가장 현명한 답이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현실의 흑과 백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외국인이 많다. 한국어는 인간의 조음기관을 고려하여 만든 부분이라서 발음상의 문제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음운현상의 한 부분인 Foreign Accent 때문에 자신의 모국어의 있는 음운규칙의 영향을 받아 발음이 어색한 외국인이 있을 뿐이다. 이태리 출신의 미녀 크리스티나 콘팔노니에니을 생각하면 쉽다. 물론 부족한 한국어 실력도 한 몫을 한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국문화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샘 해밍턴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샘 해밍턴은 교환학생시절 대학생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클럽을 다녔다. 그는 책 속에 있는 한국어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언어 그 자체를 한국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배운 것이다.


브라운관을 떠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은 어떨까? 대부분 ‘교환학생이나 유명 대학의 한국어 어학당을 통해서 한국어를 배운다. 어학당을 통해서 몇 주 혹은 몇 달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선택에 의해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른다. 체계적인 언어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온 외국인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체계적인 한국어교육을 받지 못한다. 업무에 필요한 한국어를 우선적으로 배운다. 그들에게 한국어는 살기 위한 생존무기다.

KBS <폭소클럽>의 코너 ‘블랑카의 인간극장’을 보면 “사장님 나빠요.”를 외치는 정철규의 연기를 볼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어는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람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은 현실의 벽이다. 같은 현실에 처한 외국인 여성도 있다. 그녀들은 농촌 총각의 배우자로서 며느리 역할을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보는 시선은 “사장님 나빠요.”가 전부다. [출처: KBS 폭소클럽]

외국인여성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정재영과 유준상이 출연한 영화 <나의 결혼 원정기>가 있다. 영화는 노총각이 결혼을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아름다운 결말이지만 한국 농촌사회의 뼈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길거리에 걸려있는 ‘베트남처녀 결혼’의 현수막을 보면 영화와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환경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식의 교육철학으로 콘텐츠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 적응 할 수 있도록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과 컨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문화에 접목하여 살아있는 한국어를 다양한 컨텐츠로 제공해야 한다.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많은 한국인과 교류하는 기회를 생각할 수 있다.

단순히 교육과 콘텐츠만의 문제는 아니다. 외국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도 문제다. ‘저임금으로 고용되는 노동자’,’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여성.’등의 낯 뜨거운 시선은 고개를 들 수 없게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그들도 엄연한 인간이다. 모든 외국인에게 해당되지는 않지만 몇몇의 경우에는 외국인을 위한 배려를 찾아 볼 수 없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에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언어를 통해서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다른 사고체계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우리와 다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한국문화를 통해서 한국어를 교육한다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내는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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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단언컨대’가 유행어로 인기를 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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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글자의 파괴력에 넉다운(Knock down)되다.

 

“단언컨대”의 인기비결은 간단함과 명료함에 있다.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함축적인 표현으로 다양한 의미전달 또한 가능하다. 만능 유행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4글자가 가진 파괴력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단언컨대, 과학은 예술입니다.” ,”단언컨대, 두부는 딱딱합니다.”처럼 반의적인 표현을 넣을 수 있다. 상반된 의미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예상치 못한 한 방에 넉다운(Knock down)이 되는 셈이다.


휘청거리면 일어났지만 예상치 못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다. <무한도전>의 정형돈의 유행어다. “지드래곤 보고 있나?”의 “보고 있나?”다. 패셔니스타로 불리는 지드래곤의 패션을 정형돈의 패션으로 자극한 점이 성공 요인이다. 풍자적인 요소가 그 맛을 배로 살렸다. “단언컨대”가 갖는 특징과 파괴력을 다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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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돈이 지드래곤의 패션을 지적하면서 탄생 한 “보고있나?” (출처: MBC <무한도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국민유행어의 탄생


예능프로그램 속 개그맨이 사용하는 유행어를 따라 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왜 나는 맛을 못 살릴까?” 물론, “난 개그맨이 아니니까~”라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원인은 따로 있다. 주어진 상황과 적절한 톤을 함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개그콘서트>의 뿜 엔터테이먼트의 “잠시만요~보라언니 들어가실게요~ “를 생각할 수 있다. 완벽한 구사를 위해 개그우먼 박은영의 독특한 어조와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 이점을 간과하면 단순한 말장난에 그치게 된다. 유행어도 공부해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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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박은영이 아니면 살리기 힘든 유행어 출처: KBS <개그콘서트 - 뿜 엔터테이먼트>


대부분 유행어는 그 맛을 살리는 점이 힘들지만, ‘단언컨대’는 다르다. 상황적 맥락과 톤을 고려 할 필요가 없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어디에도 어울려 사용할 수 있다. 국민유행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시대에 따라 유행어도 변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단언컨대’의 뒤를 이을 유행어로 데카르트의 코키토 명재가 낙점되었다. 광고에서는 “지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사용되었다. 사활을 걸고 마음가짐을 되새김하는 기업의 의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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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은 “언어학으로 세상을 본다. 고로 존재한다.”다. 출처: 베가CF


이전 광고의 문구처럼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 할 것 같다. 철학은 어렵게 느껴 잘 모르지만 ‘데카르트’를 모르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수학을 몰라도 피타고라스는 아는 이치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문구에 ‘단언컨대’ 처럼 열풍을 이어갈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유행어는 21세기를 들어오면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손에 쥐어진 작은 기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진다. 잠시라도 뒤쳐지면 “나 누구랑 이야기하니?”의 생각이 든다. IT기술의 발전으로 얻은 혜택이 달갑게 다가오진 않는다. 언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쓰여지는 환경도 역시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라는 말이 실감된다.


하지만 모 휴대폰제조사의 광고문구는 유행어를 공부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브라운관 속의 예능프로그램을 굳이 찾아 보지 않아도 된다. 특히 남녀노소 세대간의 차이 없이 사용이 가능한 장점도 있다.


“단언컨대, 완벽한 조건을 가진 유행어다”.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유행어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의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추억 속에 있는 유행어를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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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그녀의 노래에 하늘을 날던 기러기떼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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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면 중국 4대 미녀라며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의 일화를 소개하는 글이 많이 보인다. 어떤 글은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야사나 소설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역사 왜곡은 물론 여성에 대한 편견까지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초선은 실존 인물도 아닌 소설 속 인물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들 중, 현대 중국 정부까지 나서서 기념사업을 벌이고 추모하는 특별한 미인이 있다.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소군(王昭君)이다.



중국 현대 화가 유패(劉佩)의 사미인도(四美人圖) 중 왕소군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융합 관계

중국역사는 한족(漢族)만의 역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경정착민족인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융합 관계를 보지 못하고 한족 위주의 중화사관으로 서술된 책만 본다면 역사의 반쪽 면만 본 셈이다. 한 예로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한족의 힘의 한계를 보여주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 역사무대에 가공할 만한 큰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진나라(기원전 221 - 206)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다. 위험을 예상한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을 보내 만리장성을 완성하게 했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215년 이래 흉노로부터 중국 영토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214년경 몽염은 현재 오르도스 지역과 황하의 만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냈다. 그러나 두만선우(頭曼單于) 시대에 흉노는 감숙 서부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월지를 공격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이 흉노를 물리치기 위해 달려왔지만 현재 산서의 변경인 대동 지역에 있는 그 당시의 평성 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야만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던 협상을 통해서 뿐이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pp.71~72) 르네 그루쎄 지음, 사계절」

한나라를 설립한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도망쳐 나와 굴욕적인 화친을 청한 위의 사건 이후, 전한 시대 내내 한은 공주와 재물을 흉노에 보낸다. 한 무제 때 일시적으로 흉노를 공격해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중국은 전쟁이나 성벽 건설보다 화친정책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는 ‘책봉체제’에 ‘조공제도’였다지만 사실상 중국 조정은 유목민에게 여성과 비단, 술, 쌀 등 금품을 제공하고 평화를 산 셈이다. 중국과 대결하는 유목민족의 지배자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받은 사치품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상대적으로 강국인 중국 황제의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유리했다.
중국 왕조의 이민족 정책(기미정책)의 하나는 궁궐의 여성을 이민족 군장의 처로 보내는 통혼정책이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 후 당 대에는 화번공주(和蕃公主)라고 불렸는데, 이 화번공주가 시작된 것도 한 대였다. 최초의 예는 한의 고조 유방이 훙노 대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와 흉노와 화친했을 때 행해졌다.
당시 유방은 황실의 여성을 흉노 묵특선우의 처로 보낼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 경과가 <사기>유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유경은 장공주, 즉 이 경우에는 유방의 딸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황후인 여후(呂后)가 딸 잃는 것을 슬퍼하며 하소연하였기 때문에 유방은 대신 ‘가인(家人)의 여식‘을 장공주라고 이름 붙여 선우에게 보냈다고 한다.
-「중국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pp.117~118) 호리 도시카즈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

공주 대신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

중국 측은,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약속했지만 황제의 친딸만을 보내지는 않았다. 대개 종실의 딸을 공주로 책봉하여 보내거나 궁녀들 중에서 뽑아 보냈다.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황실의 공주 신분으로 봉해졌으며 공주 신분에 맞는 혼수품을 가져오기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화번공주(和蕃公主)라는 말 자체가 중국과 이웃 번국(蕃國) 사이의 평화를 담당하는 공주라는 뜻이기에 혈통보다 역할이 중요했다. 왕소군도 이런 방식으로 흉노의 선우(고대 북방 유목민족의 군장)에게 시집간 여인이었다.

경녕 1년(전 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사여하였다. -「한서 94 <흉노전>, <한서 외국전 역주 上> (p.186)」

왕소군은 흉노에서 영호연지(寧胡閼氏)라고 불렸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이고 우일축왕이 되었다. 호한야는 즉위한 지 28년이 되어 성제 건시 2년에 죽었다. (중략) 복주류선우는 다시 왕소군을 처로 삼아 두 딸을 낳았다.-「한서 94 <흉노전>, <한서 외국전 역주 上> (pp.192~193)」



왕소군 무덤 앞에 있는 왕소군과 호한야선우의 기마상 [출처: 위키피디아]

위 기록에서 '양가자(良家子)'라는 말은 한나라 대에 3대 이상 범죄와 관련이 없어 벼슬을 하는 데 결격사유가 없는 가문 출신 사람을 의미한다. 화번공주로 보내진 왕소군의 신분이 종실인 유씨가 아니라 왕씨 궁녀였던 것은, 이 시기에 흉노 세력에 분열이 일어나 흉노의 군사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한의 입장에서는 굳이 진짜 공주나 종실의 여성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궁녀 신분이었던 왕소군은 흉노의 호한야선우에게 시집가서 아들 한 명을 낳는다. 그녀를 부른 영호연지(寧胡閼氏. 연지는 흉노에서 왕비를 부르는 칭호. 학자에 따라 알지라고도 읽는다)라는 칭호는 오랑캐를 평안하게 하는 왕비란 뜻이니, 아마 한에서 붙인 칭호였을 것이다. 시집갈 당시 50대 후반이었던 호한야선우가 결혼한 지 만 2년 만에 사망하자 20대 전반 나이의 왕소군은 호한야와 다른 부인 사이에 태어나 다음 선우가 된 복주류선우와 재혼하여 딸 둘을 낳는다. 기록에 의하면, 아들과 두 딸 모두 흉노 사회에서 높은 신분에 속했다. 그녀의 자녀들이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높은 대접을 받고 성공적으로 흉노 사회에 정착해 살다갔음을 추측하게 한다.

왕소군에 관한 정사 기록은 많지 않다.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의 <남흉노전(南匈奴傳)>에 적힌 몇 줄이 전부이다. 이상의 기록에 드러난 것만으로 보면 왕소군은 비록 이역만리 낯선 곳에 평화사절을 빙자한 하사품으로 보내졌지만, 시집가서 비교적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범엽이 지은 <후한서>의 <남흉노전>에는, 왕소군은 입궁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하자 원망을 품고 원제가 호한야선우에게 하사할 궁녀 5명을 뽑는 데 자원했다고도 적혀 있다. 어쩌면 왕소군은 희생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찾아 스스로 움직인 적극적인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후대에 변형된 왕소군의 이미지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왕소군은 비련의 여성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후대의 문학 때문이다. 실제 그녀의 삶과 다른 전설이 생겨나 전해지다 기록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문인들이 시를 지었다. 왕소군의 이미지는 사실과 상관없는 상태로 굳어졌다. 이런 변형과 전승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당시 한과 흉노 사이의 격렬한 대립이란 흥미로운 배경에 비해 왕소군에 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후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 자신의 입장에서 하고 싶은 발언을 왕소군의 생애에 빗대어 계속 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1907년 둔황에서 다른 고중세 문서들과 함께 <왕소군변문>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소군 이야기는 민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대중문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문이란 운문과 산문을 섞어 낭독하는 통속문학을 말한다.


<왕소군변문>사본 사진. [출처 : 중국문학의 파노라마(p.59)]

서진시대 갈홍(葛洪)이 편찬한 <서경잡기(西京雜記)>는 왕소군 전설을 가장 최초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뽑았기에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다.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기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그녀의 초상을 추하게 그렸다. 그래서 원제가 초상화를 보고 가장 못생긴 궁녀를 골라 흉노에 보낼 때 왕소군이 뽑혔다. 뽑은 후 만나 보니 아름다운 여인이어서 원제는 그녀를 보내기 싫었지만 흉노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화공들은 사형에 처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희생된 왕소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한편 이면적 의도도 보인다. 화공 때문에 미인을 알아보지 못한 황제의 이야기에 빗대어,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등용하지 못하는 황제의 우매함을 조롱하는 숨은 의도가.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희곡 <한궁추(漢宮秋)>에는 위의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꾸며져 있다. 화공 모연수는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의 초상을 흉하게 그렸다. 어느 날 산책하던 원제가 왕소군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초상화를 찾아봐도 그 여인을 찾을 수가 없다. 황제의 벌이 두려운 모연수는 흉노 땅으로 도망가 선우에게 왕소군의 미모를 사실대로 그린 초상화를 보인다. 왕소군에게 반한 선우는 한나라로 쳐들어가 왕소군을 달라고 하고, 원제는 할 수 없이 보낸다. 그녀는 흉노로 가는 도중 흑하라는 강에 투신자살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왕소군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는 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살다 세상을 떠난 왕소군을 자살한 것으로 그렸을까? 이 희곡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왜 당시의 사람들은 왜곡된 사연에 감동받았을까? 몽골족이 한족을 지배하던 원나라 때였다. 이 시기 몽골인의 지배에 대한 한인의 민족 감정이 왕소군의 이야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왕소군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청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후한말기 채옹(蔡邕)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조(琴操)>에는 왕소군이 자살하는 결말이 더 비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 의하면, 왕소군은 남편인 호한야선우가 죽은 후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생모인 자신과 결혼하려 들었기에 음독자살했다. 다 거짓이다. 왕소군이 재혼한 선우는 전남편의 아들이었지만 왕소군의 친아들이 아니었고, 원래 흉노의 수혼제(Levirate marriage, 일족의 남자가 죽은 자의 아내를 아내로 삼는 것)는 친자식에게는 예외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소군은 자살하지 않고 젊은 새 선우와 결혼하여 딸 둘을 더 낳았다. 이렇게 한족의 여인 왕소군이 흉노족에 자살로 저항하는 이야기에는 명백히 한족을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보고 이민족을 야만으로 보는 왜곡된 중화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풍습도 알고 보면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흉노에는 “부자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다.”는 이른바 수혼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훗날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에서도 보이는데, 가계를 상속받은 자가 선대의 처를 계승함으로써 씨성의 혈통이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다. 그것은 처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출신 씨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아버지와 형의 처를 얻음으로써 혈족의 단결을 지키고 재산의 유출을 막는다고 하는 씨족기구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흉노(p.125) 사와다 이사오 지음, 아이필드」

왕소군 삶의 변형에 담긴 남성들의 시선

왕소군의 삶은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왕소군을 노래한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이백의 <소군원(昭君怨)>과 동방규의 <왕소군(王昭君)>이다. 이 아래 작품은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東方叫)의 <왕소군>제 2수인데, <고문진보(古文眞寶)>에는 이백의 <소군원>으로 나와 있기에 어느 책에는 이백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소군이 옥안장에 올라타는데                               紹君拂玉鞍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흐르네                    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지만                               今日漢宮人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                             明朝胡地妾
이 시의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다. 왕소군은 오랑캐 군주의 첩이 아니라 왕비인 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초원은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여성의 권리가 중국보다 높았다. 연지는 자국 내에서 중국 황후가 갖는 것보다 더 높은 권한을 행사했다. 이 시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왕소군의 심정을 제대로 그려낸 것 같지도 않다. 비록 이민족이 사는 낯선 곳으로 시집가는 것이지만 외로운 궁녀로 평생 후궁에 갇혀 살다 죽는 삶에서 벗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가정을 꾸리러 가는 길인데, 그렇게 슬프기만 했을까? 불안하지만 한 젊은 여자로서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春來不似春
저절로 옷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自然衣帶緩
허리몸매를 위한 것은 아닐세                            非是爲腰身
위의 시는 우리나라의 정치인이 1980년 ‘서울의 봄’때 ‘춘래불사춘’을 언급하여 더 유명세를 얻은 동방규의 <왕소군>제 5수이다. 왕소군이 시집갈 때 비파를 타며 즉석에서 지어 슬프게 노래 불러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가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시 전체의 내용은 흉노에 억지로 시집간 왕소군이 고향의 봄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 몸이 여위어 간다는 내용이다. 정말 그녀는 그랬을까? 자원해서 시집갔다는 설도 있는데, 정말 한족 시인의 생각대로 흉노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온 한나라를 그리워하며 여위어갔을까? 혹시 왕소군은 허리띠 잘 매어 옷자락을 정돈한 후, 넓은 초원을 말 달리며 새로운 인생을 활기차게 살지는 않았을까?


중국 드라마<왕소군>중 왕소군과 호한야선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확한 역사 기록이 없어 사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왕소군의 삶을 슬프게만 노래하는 시를 보면 당사자인 왕소군이 아니라 시를 짓는 남성들의 입장이 더 보인다. 아름다운 여성을 남의 품에 보냈지만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고 그리워해 주기를 바라는, 그녀가 불행하기를 바라는 이상한 심리가 보인다. 전해지는 전설 중에는 흉노에 보내는 여인으로 뽑힌 왕소군의 미모를 보고 반한 원제가 그녀와 3일 밤을 같이 지낸 후에야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으로 황당하다. 이는 남 주기 아까운 여자를 보내기 전에 성욕이나 채워보려는 비열한 행위가 아닌가. 사실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고, 또 이를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여기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대체 뭘까?


현대에도 이용되는 왕소군

왕소군이 자원했든 억지로 뽑혀갔든, 그녀가 한나라의 안보 정책에 희생된 여인인 것은 확실하다. 현대 중국에서도 그녀는 계속 이용된다. 오늘날 내몽골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시에는 왕소군의 묘가 있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두보의 시구를 따서 청총(靑?)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국 한나라와 원제를 그리워하는 변함없는 마음 탓인지 늘 푸른 풀이 돋아 있다는 전설이 또 붙었다. 하지만 이는 왕소군의 진짜 무덤이 아니고 신발 한 짝만을 묻은 의관총(衣冠塚)이다. 내몽골 지역에는 이 무덤을 비롯하여 열 몇 개의 왕소군 묘가 더 전해지고 있지만 후허하오터의 청총이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재 중국 정부의 북방정책 때문이다. 이 무덤은 현재 중국과 몽골 우호의 상징으로 성대하게 꾸며져 있다.

물론 왕소군이 시집간 이후 한과 흉노는 60여 년간 평화적 관계에 있었다고 하니, 그녀가 평화의 상징이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업적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거짓 기념물까지 성대하게 짓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은 '현재 중국 강역을 중국사의 범위로 삼아야 한다'라는 모택동의 교시에 따라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틀에 맞춰 몽골사를 중국사로 바꾸는 역사 편입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몽골 등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추진하는 이런 역사 프로젝트를 ‘북방공정’이라 부른다. 이렇게 왕소군은 이천여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한족 지배층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왕소군 무덤 앞 비석 사진. ‘호한화친’이라 적혀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의 왕소군, 의순공주

이렇게 왕소군의 삶이 문학적으로 해석, 변용되고 현실적으로 이용된 모습을 추적해가면 당시 중국인들의 자민족과 타민족을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을 보는 일부 남성들의 왜곡된 시각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 소중화 의식에 젖은 우리나라의 문인들도 유행처럼 <소군원>류의 시를 모방해 지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왕소군처럼 왜곡된 전설을 가진 공주가 있다. 바로 의순공주(義順公主)이다. 종실의 여성이었던 그녀는 병자호란 후 효종 때 청나라 섭정왕인 구왕(도르곤)의 요구에 진짜 공주대신 공주로 봉해져서 청나라로 시집갔다. 구왕 사망 후에는 청 황실의 일족에 속하는 남성과 재혼했다. 시집간 지 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으며 재혼까지 했다고 죽을 때까지 주위의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전설 속의 의순공주는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말하며 청나라로 시집가는 길에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도 의정부에는 의순공주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공주의 시신을 찾지 못해 족두리만 건져서 무덤을 만들었기에 족두리 무덤이라 부른다.

왕소군이든 의순공주든, 이렇게 사실과 다른 전설이 생겨나 사실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유는 뭘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타국에 보내는 여성을 지켜주지 못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나마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었던 아닐까. 자신들의 재산인 여성을 외국 남성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여성의 정절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너무 지나치다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인 ‘환향녀(還鄕女)’를 부르는데서 기원한 욕인 ‘화냥년’을 생각해보자. 돌아온 그녀들은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한양 성 안에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울 서대문 밖, 지금의 홍제동에 머물렀다. 조정에서는 홍제천 냇물에 몸을 씻게 하는 상징적 의식으로 이혼 위기에 처한 그녀들을 구해주려 했지만 남편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고서도 자결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 돌아왔다며 그녀들을 죄인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실제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하면서, 전설에서는 절개를 지킨 여성으로 숭상하여 자살시켜 버리고 가짜 무덤을 만들고 제사까지 지내며 그녀를 기리는 것은 결국 나약한 남성들의 소심한 자기 위안 정도가 아니었을까.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그러나 이 땅의 모든 남성들이 그런 찌질한 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닌 모양인가 보다. 다음과 같은 멋진 시도 전한다.
조선시대의 일이다. 어떤 고을의 향시(鄕試)에 제목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로 내걸렸다. 응시생들은 모두 왕소군의 고사를 들어 장광설을 늘어 놓았다. 막상 장원에 뽑힌 작품은 덩그러니 제목을 네 번 반복해서 쓴 한 서생의 작품이었다.

오랑캐 땅 화초가 없다고 하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마는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네.                        胡地無花草

어떤가? 같은 글자의 풀이가 모두 제가끔이다. 한문 해석의 모호성을 말할 때 인용하곤 하는 이야기이다. 위 시는 흔히 김삿갓(金炳淵, 1807 ~ 1863)의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시 미학 산책(p.153) 정민 지음」
그렇다, 오랑캐 땅이라고 어찌 화초가 없을까? 오랑캐 땅이라고 편견을 갖고 보니 화초가 있어도 화초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왕소군을 비롯, 이민족의 땅으로 시집간 모든 여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시집간 그녀들이 늘 고국과 고국의 남성을 그리워하며 불행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랑캐와 문명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하는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면 다 마음 두고 화기애애 웃음꽃 피우며 잘 살 수 있지 않은가? 남편될 사람의 사람됨이 문제이지 그 민족이 문제였을까?

“슬프구나! 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한나라 사람들이여!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이는 사마천이 쓴 <사기 열전>의 제 50편 <흉노열전>에 실린, 한나라 환관이었다가 흉노에 투항하여 두 세계를 다 겪어본 중행렬이 하는 말이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이민족에 보낸 여성들의 삶을 왜곡하고 이용하는,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딱 해주고 싶은 말이다.


세상의 모든 화냥년들을 보라

왕소군, 이 언니를 보라. 차지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남자들의 미련이 이 언니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그려냈고, 자민족 여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긴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녀의 자살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게 뭔 말인가.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보내놓고, 자신들의 평화를 지켜준 고마운 여인에게 뭔 헛소리인가. 소중한 생명, 누구를 위해 쓸데없이 정절을 지켜 그녀가 자살하기를 바라는가. 그런 삶이 뭐가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여겨 왜곡된 전설에 감동받아 현대인인 우리까지 역사적 사실인양 이야기하는가.

왕소군, 이 언니를 보라. 의순공주를 비롯, 이민족에게 희생양으로 시집간 다른 언니들을 보라. 비난받는 재혼을 한 다른 여성들을 보라. 세상의 모든 화냥년들을 보라. 어쩌면 그녀들은 불리한 현실에 적응하여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씩씩한 언니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겨우 어줍잖은 자기 본위 중화사상이나 정절 따위로 모욕하지 말라. 부디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열심히 사는 언니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화초가 피어나는 곳이니까!


[관련 기사]

-나 미실, 이 언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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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어를 사용하는 무서운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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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어 구사능력이 뛰어난 10대?

고등학생들을 마주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만약 곱지 않은 인상의 소유자라도 있다면 길을 우회한다. “다 큰 청년이 뭐가 무서워서 피하냐?”냐고 핀잔을 줄 수 있지만, 이상하게 고등학생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체격조건이 전혀 밀리지 않는데 말이다.

되도록 고등학생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는 대화는 피할 수 없다. 듣기 싫어도 두 귀가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대중교통 안에서 사진을 보며 “야! 캐멋있어!”라 외치던 여고생이 생각난다. 순간 난 “아… 개를 사랑하는 순수한 아이들이구나!”라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실상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여기서 ‘캐-‘는 접두사로서 강조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캐싫어!”, ”캐맛있어!”처럼 말이다. 10대들의 놀라운 단어형성능력에 놀랐고 언어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가슴 속 수치심을 안겨 준 에피소드였다.


카톡테마만 깜찍한 10대들의 대화

다른 에피소드도 생각난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다. 친구처럼 다가가려고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이 때 세대차이를 느꼈다. 특히 초등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치 토익 LC시험을 보고 있는 시험장에 온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만의 문화를 공유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부는 끝이 없다. 10대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돌만으로 부족하다.
언어도 공부해야 한다.


그들만의 세상 속 언어

질풍노도의 시기에 겪는 현상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다. 또래집단과의 문화공유의 차원으로 보는 시선은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외에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왕따 문화’‘매체의 변화’의 측면이다.

첫 번째는 학교 깊숙이 존재하는 ‘왕따 문화’다. 일본에서 ‘이지메[ イジメ ]’ 라 불리는 문화로 한국 교실에 유행처럼 들어왔다.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으며 언어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비교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왕따 문화’의 전후 시기 사용된 단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왕따’는 ‘왕따 문화’가 들어오면서 생긴 단어다. 격한 단어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단순히 단어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비교하는 접근에 목적을 두는 건 아니다. 그 이면의 숨겨진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강력한 결속력의 결과물로 태어난 집단간의 문화교류의 부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왕따문화’가 있다.

두 번째는 대화를 주고 받는 ‘매체의 변화’다. 기술의 발전으로 40자의 제한된 글이 아닌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MSN과 네이트온과 같은 메신져프로그램은 PC환경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옮겨져 공간의 제약도 사라졌다. 대화를 제약하는 시공간의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네이트온은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로그인과 동시에 난 한 마리 하이에나가 되었다.

매일 수 많은 메시지를 주고 받기 때문에 축약된 표현의 쓰임이 많아졌다. 예를 들면, “안녕하세요.”“ㅎㅇ”로 한글 초성으로 축약하여 사용한다. 이외에도”내가 그랬다고? 막이래”의 “막이래”와 같은 표현도 빈번히 사용된다. 문장에 끝에 위치한 강조의 부사어로 경상도 사투리 “막 이케”와 같은 뜻이다. 반복되고 강조되는 표현의 쓰임이 유독 많아졌다.

대화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다양한 언어현상이 나타난다. 언어는 대화를 통해서 전승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10대들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문화가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단순하게 나쁘다고 생각해야 하나?

사람들은 10대들의 언어습관으로 인해 한글이 파괴된다고 많은 걱정을 한다. 10대들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올바른 국어문법을 숙지하고 사용하면 애늙은이 취급을 받기 쉽다. 또래들과의 원활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현실적으로는 언어영역에 문법문제를 맞힐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10대들의 무분별한 언어사용에 대한 걱정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즉, 그들의 언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법체계로 생각해야 한다. 공식적인 자리나 시험문제에 사용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 언어가 갖고 있는 생산성의 특징을 반영한 예라고 생각한다.
[출처: 국립국어원]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만큼 문화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기성세대의 잣대를 가지고 10대의 언어습관과 문화를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부정적이고 걱정스러운 시선은 잠시 접어두자. 이제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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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가득한 응답하라 1994 감상, 왜 응사앓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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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기억에 호소하는 작품은 흥행에 유리하다. 그런 면에서 <응답하라 1997>의 후속작인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는 인기를 끌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응사’가 바로 기억에 호소하는 드라마기 때문이다.

 

응사.jpg

 

믿음직한 배우, 정우

 

평소에 드라마는커녕 TV도 잘 보지 않는 내가 ‘응사’를 본 이유는 ‘정우’라는 배우 덕택이다. 부산에서 (남자)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한다는 영화, <바람>. <바람>을 권했던 친구는 과장 조금 보태 10번이나 그 영화를 봤다고 했다.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인지라, 그 말을 듣고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과연 <바람>은 명작이었다. <친구>가 남자 고등학교 주먹 세계의 엘리트 버전이라면 <바람>은 남자 고등학교 주먹 세계의 일반인 버전. 그만큼 보통의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영화에 공감할 만한 장면이 많다. 장동건이 <바람>에 출연했다면 1,200만은 거뜬히 넘겼을 법한 작품이라고나 할까. 

 

 바람.jpg

영화 <바람>에서 다소 어리숙하고 껄렁한 연기를 보여준 정우.

물론, 이미 20대 후반이었던 그가 고등학생 역을 맡은 게 비쥬얼상 어색하긴 했지만.

 

이 작품은 소름 끼칠 만큼 사실적으로 부산의 (남자)고등학교 풍경을 묘사했으나 <친구>류의 작품이 더는 인기를 끌지 못하는 2009년에 나왔다는 점,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유명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럼에도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는 점으로 흥행하지는 않았던 영화다. 어쨌든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정우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막장 이야기였던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마저 정우가 출연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보고 말았다.

 

그런 정우가 ‘응사’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 삶에서 절대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채널고정, 본방사수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 나는 TV 앞에 앉아 광고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고 말았다.

 

서울이 고향이 아니면서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 공감할 만한 드라마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시트콤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웃기다. 다양한 요소가 드라마를 재밌게 만들지만, 그중에서 압권은 등장인물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온 대학생들이 한 집에서 하숙하는데, 이들은 출신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다. 경상도 삼천포와 마산, 전라도 순천과 여수, 충청도 괴산 등 이들은 모두 각자 지방의 사투리를 쓴다. 


매회 등장하는 신선한 사투리는 드라마가 가진 다양한 매력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대뽀 깐다’, ‘눈까리 노름에서 꼬란나’를 인상 깊게 들었다. 사투리와 함께 이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오면서 겪는 문화 충격을 드라마는 재밌게 묘사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서울을 고향으로 둔 시청자로부터는 공감을 못 받을 텐데, 칠봉이라는 존재로 지역별 균형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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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처음으로 접한 KFC 비스킷.

그 비스킷은 이 비스킷이 아니었다.

 

칠봉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서울이 낯선데, 이들은 서울에서 겪는 하루하루가 새롭다. 지하철 타는 법을 몰라 서울역에서 신촌 하숙집까지 가는 데 한나절이 걸린 삼천포의 사연이나 미팅에서 여대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KFC 비스킷을 40개씩 시키는 장면은 4회까지 내용 중 압권이었다. 이런 식으로 드라마는 지방에서 서울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묘사해, 94학번이 아니라도 서울에서 문화 충격을 한 번이라도 받았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사연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드라마에 빠질 수 없는 로맨스

 

지방 출신이 서울에서 겪는 일화는 발굴하면 많겠지만, 언젠가는 소재가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이 중국만큼 땅이 넓은 나라가 아닌지라 지방과 서울 간 차이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가 시청자에 호소하려면 추억 외에도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바로 로맨스다. ‘응사’는 지방 출신의 다양한 인물이 겪는 코미디 요소와 여성 1명과 남자 5명이 만들어가는 로맨스라는 극적 요소가 공존한다. 물론 4회까지 내용에서 로맨스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갈수록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특히 친남매인 줄 알았던 쓰레기(정우)와 성나정(고아라)이 합법적으로 연인이 될 수 있는 관계로 밝혀지며 묘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 5명은 저마다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집에서는 허점투성이나 학교에서는 천재로 불리는 의대생 쓰레기. 대학야구 최고 에이스 칠봉이(유연석)는 잘 생긴 외모와 튼실한 덩치 등 하드웨어가 강점이다. 신입생이라 믿기지 않는 노안의 소유자 삼천포(김성균), 순천 날라리 해태, 얌전한 샌님 이미지의 빙그레도 저마다 묘한 매력을 풍긴다. 


게다가 삼천포, 해태, 빙그레 모두 명문대생에 지방에서는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다. 현실이라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 5명 모두 성나정이 누구를 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상적인 배우감이다. 등장 인물 모두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는 설정은 로맨스 전개 뿐만 아니라 극 전반의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드라마가 우울해지지 않고 경쾌할 수 있어서다.

 

소소한 감동은 보너스

 

시트콤에서 느낄 만한 재미와 다양한 인물 간에서 교차되는 사랑의 작대기. 여기에 ‘응사’는 감동이라는 필살기를 장착했다. 4회에서는 자식과 부모 간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2번 나왔다. 재혼하는 엄마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칠봉이가 삐삐로 엄마가 남긴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는 장면. 그리고 해태가 엄마와 통화하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에 눈물 흘리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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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엄마가 통화하는 장면에서 함께 오열(?)했다는 시청자 사연이 속속 인터넷을 장식했다

 

이렇듯 ‘응사’는 재미와 로맨스 그리고 감동이라는 3가지 무기로 시청률 3%를 넘어서는 등 시청자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케이블 시청률 3%는 공중파 20%와 맞먹는 정도니 적지 않은 수치다. 다만 ‘응사’가 전작의 흥행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비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 지방 출신 등장인물이 서울에서 겪는 황당한 사건은 회가 거듭할수록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삐삐, 농구대잔치 등 19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얻을 소재도 적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엮어가는 로맨스와 감동을 어떤 장면에 배치하느냐가 드라마가 종영할 때까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할 듯하다.


* 쓰고보니 배우 정우 예찬으로 시작한 글인데 정작 드라마 속 정우를 다룬 내용이 없네요. 어쨌든 1년 동안 잠잠했던 ‘여의도 삼인회’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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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 가수만으로는 심심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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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MYSTIC89]

그를 실물로 본 것은 딱 두 번이다. 평창동 Lob이라는 카페에서, 그리고 <나는 가수다> 호주 편 녹화장에서. 물론 눈을 마주친 만남은 아니었다. 나만 훔쳐봤다고 하기에는 뭐랄까. 억울하니 우연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윤종신이 운영하는 작업실 겸 카페 Lob의 단골이 됐던 때가 있었다. 순전히 레몬티가, 팥빙수가 맛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근처에 괜찮은 카페도 많았지만 유독 마음에 쏙쏙 드는 BGM, 사후에는 분명히 더 대단한 아티스트로 인정 받을 조영남의 작품이 액자로 걸려있었기 때문?! 평창동 주변에서 약속이 생기면, 맛있는 타르트 가게와 분위기 좋은 키미아트, 가나아트센터 카페를 뒤로하고 친구에게 “Lob에서 만나”를 메시지로 보냈다.

‘언젠가 카페 주인 윤종신을 볼 수 있겠지?’ 이런 사심은 카페 방문이 잦아질 때쯤 사그라졌다. ‘바쁘니 뭐, 카페에 자주 들리겠어?’ 간간히 윤종신 아내 전미라를 보면서, ‘참 인상 좋네. 키 커서 좋겠다. 아빠 윤종신은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다’를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뭐 팬심으로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작사가 윤종신의 글을 좋아하니까’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출입문을 쳐다보던 습관을 버렸다. 그렇게 카페를 여섯 번쯤 갔을 때였나? 팥빙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앞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가 내게 속삭였다. “야, 윤종신이다” 드디어, 주인장을 목격하는 것인가? 나는 최대한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려 옆 테이블을 슬쩍 봤다. 신화 출신 가수 김동완과 윤종신이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살짝 듣기론, 군 제대 후 연기자 활동을 시작하는 김동완이 윤종신에게 ‘연예계 상담’을 하는 듯 보였다. 69년생 윤종신, 79년생 김동완. 나는 윤종신의 패션을 살짝 스캔했는데 김동완 못지않은 감각이었다. 특히 운동화가 예뻤던 걸로 기억된다. (윤종신은 언제부터인가, 굉장한 스타일리스트를 두었는지 남다른 패션감각을 뽐내고 있다. 난 그것이 참 마음에 든다. 작은 키를 보완하는 헤어 스타일이나, 파스텔 톤의 큰 뿔테 안경. 내가 패션에는 문외한이라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윤종신 안경테가 꽤 검색어에 많이 오르는 걸로 알고 있다)

Lob의 단골로서 인사를 한 번 나눌까, 싶었지만. 나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지켜주자’는 신념을 가진, 예의와 매너가 몸에 배인 사람이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호주에서 펼쳐진 MBC <나는 가수다> 녹화 현장에서 윤종신을 다시 보게 됐다. 멜번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윤종신의 팬 몇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있길래, 나는 깜짝 놀랐다. ‘윤종신이 이 정도였나?’하며 뿌듯함을 느끼며 ‘나도 셀카 한 번 찍어볼까? 살짝 고민했으나, 당시 나의 신분도 있고 함께 간 사진기자 선배가 나를 창피해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내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 걸로 만족했다. (나는 정말이지,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싶은 선량한 시민이다)


이런 담백한 가사는 어떻게 쓰나요?

윤종신이 내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의 노랫말, 뛰어난 창작력 때문이다. 나는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은 아니지만, 가사가 좋은 노래는 오랫동안 애정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윤종신 노래는 가사도 가사지만, 노래 제목이 예술이다. 2010년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에 수록된 6월 곡 「넌 완성이었어」 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내게 어떤 의민지, 나의 입 꼬리는 볼을 찌르네.”, “이어폰 없이도 흐르는 멜로디. 넌 내게 완성이었어.”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면 이런 가사를 쓸 수가 있지? 그것도 애 아빠. 유부남이 된지 한참인데도 말이다. (아마 내 남편이 결혼 후에도 이런 가사를 쓴다면, 나는 추궁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구를 생각하며 쓰는 것이야? 라고) 윤종신 11집 <동네 한 바퀴>에는 「무감각」 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 무감각이라니. 아 무감각이라니! 어찌 가요에 이렇게 멋진 제목을 쓸 수 있단 말이지? 내 마음에 밑줄을 친 노랫말은 “보고 싶던 날들이 폭풍처럼 지나가면, 견뎌온 그 날 들에 길들여진 나 어느 샌가 아프지 않아. 그냥 살아갈만해 하루하루 가긴 가거든.”, “이내 바로 깊은 밤 나를 재워줘 현실이라는 마취제로.”‘현실이라는 마취제’라니, 이런 비유는 도대체 어떻게 떠오르는 거지? 당시, 예능 늦둥이로 활약하던 때라 ‘가수 윤종신’의 감이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역시 그의 감성은 그대로였다. 아, 10집 <Behind The Smile>에 수록된 「너에게 간다」 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추억하는 가사는 “너와 헤어짐에 자신했던 세월이란 믿음은 나에게만은 거꾸로 흘러.” “너에게 간다. 다신 없을 것 같았던 길, 문을 열 면 네가 보일까.”언젠가부터 나는 연인과 이별하고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윤종신 앨범을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환생」, 「오래 전 그날」 등 윤종신의 초기작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아이돌 스타가 장악한 2000년대 가요시장에서 윤종신 앨범은 빛을 보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았다.




2010년 3월부터 시작된 <월간 윤종신>, 아티스트의 남다른 행보

왜냐, 윤종신의 역작은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부터 윤종신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월간 윤종신>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새로운 아티스트와 곡을 작업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작사가, 작곡가, 가수가 아닌 ‘편집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참신한 기획인가? <월간 윤종신>이 처음 나왔을 때는 기존 팬들의 반응만 있었지만, 이제 정기구독자가 꽤 늘었다. 2013년 <월간 윤종신>은 그동안 윤종신이 만들었던 곡을 다시 부르는 ‘리페어(Repair)’ 콘셉트로 음원을 발표하고 있다. 1월호 ‘사랑의 역사’, 2월호 ‘내일 할 일’에 이어 10월에는 ‘Annie’를 발표했다. 11월호는 자우림 김윤아와 길과 작업한 ‘그댄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윤종신의 또 다른 재미있는 행보는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monthlyjs)이다. 윤종신은 연예인치고 매우 일찍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팬 수가 15만 명을 넘어섰다. (예스24 공식 페이스북 팬이 곧 12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으니까, 여하튼 대단한 수치다!) 발표된 곡 홍보를 위주로 글을 올리지만, 간간히 올라오는 윤종신의 일상 이야기, 사진도 여간 재밌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를 윤종신 페이스북을 보면서 깨닫는다. 특히 <월간 윤종신> 앨범 재킷과 각종 디자인. 어떤 프로와 작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TOP 수준이다.


심사위원 윤종신 VS 제작자 윤종신

윤종신은 과거 예능인들을 주로 포섭한 한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지만, 최근 ‘미스틱89’라는 회사를 꾸렸다. 초기 멤버는 윤종신과 함께 ‘신치림’ 활동을 했던 조정치와 하림. 이제는 박지윤, 김예림, 김연우, 김정환, 뮤지 등 13명의 아티스트가 소속되어있다. 재밌는 것은 방송작가 김은희와 장항준 감독이 미스틱89 소속이라는 것. 윤종신은 장항준 감독과 오래 전부터 절친인데 이제 소속사 사장과 직원 관계가 됐다. (개인적으로 장항준 감독의 후속작을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다. 미스틱89 소속 가수들이 출연하는 시트콤을 제작해보면 어떨지? 위험한가?!)

윤종신이 Mnet <슈퍼스타 K> 출신 투개월(김예림, 도대윤)을 식구로 맞이했을 때, ‘이야! 투개월 복 터졌네’ 싶었다. 투개월이 YG, SM으로 갈 경우의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슈퍼스타 K> 심사위원이었던 윤종신이 그들을 거둘 것으론 예상치 못했다. 이 둘의 계약은 윈윈으로 보인다. 김예림이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All right」 를 발표했을 때, ‘이거 윤종신이 쓴 곡 맞아?’라며 살짝 놀랐지만, ‘신의 한 수’였다. 김예림이 기존 투개월 스타일의 노래를 발표했더라면, 이 무서운 가요시장에서 쉽게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윤종신은 가수 박지윤을 캐스팅했다. 박지윤은 아니라고 하지만, 난 박지윤이 박진영을 만난 건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색 꿈」 을 부르던 박지윤이 「성인식」 을 부르며 섹시한 춤을 출 때, 나는 리모컨을 꺼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눈엔 젖은 헤어 스타일로 다리를 벌리고 춤을 추는 박지윤이 무척 슬퍼 보였다) 이후 박지윤은 오랜 침체기를 갖다가 2012년 7집 <꽃, 다시 첫 번째>를 내면서 복귀하지만,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박지윤이 진짜 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작곡까지 했지만, 마케팅 능력이 없었던 제작자를 만난 탓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지윤이 시트콤 <닥치고 패밀리>에 출연했을 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배우 박지윤의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필시, 그녀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한 출연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박지윤은 윤종신을 만나게 됐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제작자, 윤종신을 만난 건, 기도를 열심히 한 까닭이 아닐까? 재밌는 것은 박지윤의 복귀작, 「미스터리」 가 윤종신이 아닌 프라이머리의 작품이라는 것. 윤종신은 두 번째 타이틀곡 「목격자」 를 작곡했다.

윤종신은 욕심쟁이지만, 무턱대고 욕심을 부리는 욕심쟁이는 아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 어울리는 것들만 건드린다. 박지윤을 캐스팅하고 분명, 본인의 곡을 타이틀로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곡가이기 전에 제작자 윤종신의 선택은 프라이머리의 곡이었다. (운 좋게 박지윤의 컴백은 MBC <무한도전> 가요제 ‘프라이머리’ 출연과 절묘한 타이밍을 이뤄, 이슈가 됐다)

미스틱89에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가수가 한 명 더 있다. 지난해 <슈퍼스타 K4> TOP 6였던 김정환. 윤종신은 지난해 <슈퍼스타 K>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지 않았지만, 김정환을 눈여겨봤나 보다. (나 역시, 가장 뛰어나게 봤던 출연자였는데 미스틱89로 가다니! 정말 기대된다) 윤종신은 김정환의 데모곡을 듣고 한 번에 계약하자고 했을 정도로 김정환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김정환은 자작곡을 타이틀곡으로 들고 나오되, 편곡은 윤종신이 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현재 생방송 중인 <슈퍼스타 K5>는 예전만 못하다. 눈에 띄는 출연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청률, 이슈성 또한 최저 수준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나지만, 금요일 밤 11시가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 다만 가끔 채널을 돌리는 건, 윤종신의 탁월한 심사평을 듣기 위해서다. 윤종신은 독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만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기본적으로 애정을 밑바탕에 두고 평가한다. 그래서 귀에 거슬리는 심사평이 없다. 이승철의 쓴 소리, 이하늘의 어처구니 없는 심사평을 듣고 윤종신의 심사평을 듣노라면 ‘내가 슈스케 출연자였더라면 필시 윤종신 소속사로 들어가고 싶어서 애원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간혹 카메라에 비치는 윤종신이 출연자들을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 애정 어린 시선은 그를 참 신뢰하게 만든다. (팬심 아닌 객관적인 사견임을 밝히는 바다)

유희열이 곧 방송 예정인 SBS <K팝스타 시즌3> 심사위원으로 출연한단다. 유희열의 잦은 예능 행보가 다소 놀랍다. <무한도전> 출연은 반가웠지만, <SNL 코리아>에 나왔을 때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상상만 하고 싶었다. 그의 변태적 매력을!) 여하튼 유희열의 심사 실력은 윤종신과 비교할 만하지 않을까, 기다려진다.

그나저나, 윤종신은 나의 인터뷰 요청 메일을 읽어 보았을까? 수신 확인이 되지 않는 메일로 보낸 것이 차라리 다행인 걸까? 언젠가,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인터뷰어, 인터뷰이로 만날 수는 있겠지. (그가 얼른 책을 내야 만날 수 있을 텐데. 출판사 편집자 여러분들! 윤종신에게 기획안 좀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ㅠㅜ) 인터뷰를 하게 된다면, 뻔한 음악 이야기 말고 그냥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스스로 ‘촉 있는 둔재’라고 말했다지? 내가 보기엔 천재인데, 물론 ‘노력하는’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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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태호 PD님, 휴대폰 좀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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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이 방송되는 토요일 저녁, 언제나 <무한도전>은 실시간 검색어 상위를 차지한다. 2006년 5월 첫 방송을 시작해, 지난주 355회(2013. 11월 9일 방송)로 시청자들을 만난 <무한도전>. 2년마다 열리는 ‘무한도전 가요제’는 올해도 어김없이 뜨거운 감자였고, 지난주 방송된 ‘관상 특집’ 편은 방송 전부터 스포일러성 기사가 공개되어 제작진이 곤혹을 치렀다. 김태호 PD가 개인 트위터(https://twitter.com/teoinmbc)에 남긴 짧은 트윗 마저 실시간으로 빠르게 퍼졌다. (김태호 PD의 팔로워 숫자는 55만 명을 넘어선다. 김 PD가 트위터를 매우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기에 퍽 높은 수치다.




<무한도전> 안 봤어? 그럼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시청률이 높지 않았더라도 매주 쏟아지는 <무한도전> 리뷰. 수많은 리뷰 축제 속에 한 페이지를 더할 생각은 없다. 김태호 PD의 기획력을 무척 높게 평가하지만 그의 추종자도 아니고, 예능 프로그램 없이는 한 주를 견뎌낼 수 없는 예능빠도 아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김태호 PD의 휴대폰, 김 PD의 목소리, 그리고 <무한도전>의 영향력이다. (이게 무슨 소리?!)

주변에 <무한도전> 추종자들이 매우 많지만, 너무하다 싶은 인기에 괜스레 질투를 느낀 적이 있다. 한 주라도 시청을 그냥 패스할까 치면, 대화 그룹에서 소외감을 느껴야 하니, 본방사수는 못하더라도 ‘어떤 주제로 방송이 됐는지’ 정도는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무한도전>의 영향력을 가장 크게 느꼈던 일은 지난 2012년 MBC 파업 사태 때, 네티즌이 보여준 반응이었다. 김태호 PD의 파업 참여로 장장 24주간 결방된 <무한도전>. MBC 파업이 계속될 때, 시청자들이 가장 분노했던 것 중 하나는 <무한도전>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점이 매우 놀라웠다. 방송사의 파업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기보다는 <무한도전> 결방이 그저 속상한 시청자들. 도대체 <무한도전>이 뭐길래!

MBC의 다른 예능 프로그램은 책임PD가 대타로 연출을 맡고, 외주 제작사에게 시간대를 내주면서 꾸역꾸역 이어갔지만, MBC 예능의 독보적인 존재 <무한도전>은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김태호 PD는 프리랜서 작가들과 스태프들에게 가장 큰 미안함을 전하며, 7명 멤버들과 함께 <무한도전> 신사동 연습실에서 회의를 하며 ‘간추린 무한뉴스’를 제작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무한뉴스’는 퍽 감동적이었다. 대한민국에 과연 이런 프로그램이 존재한단 말인가?

<무한도전> 녹화 날짜는 (대한민국 전국민이 다 아는) 매주 목요일. MBC 방송사가 여의도에 있기 때문에 종종 촬영 현장을 마주칠 수 있었다. 직장인들이 대부분인 여의도이지만, 녹화 장소를 어떻게라도 알아낸 <무한도전> 광팬들은 VJ 못지않은 달리기 실력으로 촬영 현장을 뒤쫓기도 했다. MBC 방송사가 내년 상암동 신사옥으로 이전할 예정이니, 이제 DMC 주변에서 <무한도전> 촬영 현장을 만나는 일이 멀지 않았다.


김태호 PD,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

지난주, 일을 하다 문득 김태호 PD의 휴대폰 전화 목록이 궁금해졌다. 나는 김태호 PD의 추종자도, 팔로워도 아닌 그냥 <무한도전>을 적당히 좋아하는 소시민일 따름이지만, ‘2013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에서 발표된 노래들을 흥얼거리다 김 PD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무한도전> 김태호 PD인데요. 이번에 XXX 특집이 방송될 계획인데요. 출연이 가능하실까요?” 이 목소리만이라도 녹음을 해서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김태호 PD의 목소리, 아니 <무한도전> 제작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바쁘다”며 전화를 끊을 연예인은, 매니저는 없을 것만 같았다.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에는 유희열, GD, 보아, 김C, 프라이머리, 장미여관, 장기하와 얼굴들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심사숙고한 출연진도 있었겠지만 ‘무한도전 가요제’는 꽤나 욕심 나는 타이틀이다. (대한민국 톱가수들도 앨범 발표를 ‘무한도전 가요제’를 피해가고 싶을 정도이니, 할 말 다 했다)

과거, 김태호 PD를 20분 정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무한도전> 200회 특집을 축하하는 매우 건조한(?) 인터뷰였는데, 매우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인상에 남았다. 박명수와 외모를 비교 당한 전적이 있지만 실물이 꽤 멋졌고 패션감각 또한 연예인 못지않았다. 내가 느낀 김태호 PD의 인상은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유명인을 인터뷰하다 보면,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네?’ ‘지나친 겸손 아냐?’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하는데, 김태호 PD는 매우 적절한 대답, 감정적이지 않되 솔직했다. 말이 많지 않은데, 성량이 크지도 않고, 어조도 매우 평범한데 듣는 사람을 경청하게 만들었다. 트위터에 올리는 글도 그러하다. 수다스럽지 않다. 가오도 없다. 젠체하지도 않는다. 이제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MBC 사장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대한민국 NO.1 예능 PD인데 한결같다. <무한도전>에 대한 애정, 멤버들에 대한 애정, 제작진과 게스트에 대한 배려가 트위터에도 드러난다.

김태호 PD가 어떻게 PD가 되었으며, 방송사 면접 때 얼마나 독특한 발언을 했는지,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소지섭, 이나영, 조인성, 패리스 힐튼 등 <무한도전> 특집에 출연한 톱스타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런 것들을 쓰려고 수집해놓았다가, 불현듯 흥미가 사라졌다. 김태호 PD가 지난 9월 24일, 리트윗한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MBC 기자 출신으로 목회자가 된 조정민 목사의 트윗이다. 김 PD의 심경을 대변하는 글이었나 싶다.
사람의 가장 큰 능력 중의 하나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무시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시해야 할 그 말을 보석처럼 가슴에 품고 삽니다.
<무한도전>은 8년간 호평이 줄을 이었지만 혹평도 만만찮았다. 간혹 몇 주 시청률이 떨어지면 “<무한도전> 뒷심 부족하나?”와 같은 기사들을 목격해야 했다. 이럴 때, 김태호 PD가 보여준 반응은 매우 인상 깊다. “항상 재미있고 새로울 수는 없다.” 뻔뻔한 대답이 아니다. 열심히 한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이다. 김태호 PD의 당당한 항변이 <무한도전>의 8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프라이머리의 표절 논란으로 ‘무한도전 가요제’의 인기가 예년만큼 뜨겁지 않다. 아직까지 <무한도전>은 공식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몇 개 매체들은 “<무한도전>, 왜 가만히 있나?”라며 때이른 호통을 치고 있다. 아티스트가 아직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무한도전>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궁금할 따름이다. 김태호 PD는 언제나 그렇듯,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메이저 지상파 방송사의 TOP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디밴드를 초대하고, 직장인의 설움을 담아내고, 때로는 시청자들에게 연출권을 주며 매년 달력을 제작해 수익금을 기부하는 <무한도전>. <무한도전>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프로그램도 없지 않은가 싶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 단체곡을 녹음하다 눈물을 흘린 정형돈을 보며, 김태호 PD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차차! 오는 11월 27일 악스코리아에서 열리는 ‘제 7회 예스24 문화축제’에 김태호 PD가 연사로 출연한단다. 올해는 주제가 ‘내게 첫사랑 같은 책, 영화, 음악’이다. 김태호 PD에게 첫사랑 같은 영화는 무얼까, 진심 궁금하다. 다행히도 입장료는 없다. 김태호 PD 외에도 소설가 김영하, 발레리나 김주원, 뮤지션 요조와 장미여관이 출연한다. 장미여관은 <무한도전> 출연 전에 결정된 걸로 전해 들었다. 신청은 예스24 블로그 이벤트 코너 (http://blog.yes24.com/blogmain/yesevent/Event79)에서 가능하다.

[관련 기사]

-무한도전 가요제, 너희들 왜 그렇게 열심이니
-장미여관 육중완 “친구들이 이제 나랑 안 만나주려고 한다”
-정형돈 눈물의 의미, 우리는 이해한다 <무한도전-자유로 가요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고픈 여행자만 느낄 수 있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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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상남도 남해를 다녀왔다. 예쁜 지명을 좋아하는 까닭에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남해였다. 가보면 실망한다는 독일마을, 사진발이라는 다랭이마을. 두 군데를 들러보자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남해군 남면까지, 구간단속구간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5시간을 달렸다.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이 언제나 만족스럽진 않지만, 지나친 기대는 허탈한 마음만 선물할 뿐이다. 늘 그렇듯 최소한의 정보만 머릿속에 담고 1박 2일,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단 이번 여행은 두 시간만이라도 사색을 즐기고자 배낭에 책을 세 권이나 쑤셔 넣었다. 결론적으로는 나를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차가 잠시 정체됐을 때, 10페이지 독서를 한 게 전부였다. 대부분 멍 때리며 하늘을 보다가, 자다가, 운전 교대를 했다.


다랭이마을

바닷가마을을 가면 늘 회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동행자가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회는 식단에서 제외했다. 나 또한 올 초 속초 동명항에서 흡입한 자연산 광어를 뼈째 먹고 탈이 난 후로, 여간해서 회가 당기지 않는다. 남해에 들어서니 우리를 반긴 건, 멸치쌈밥집의 행렬이었다. 이름 한 번 깔삼한 멸치쌈밥. 그러나 지나치게 강렬한 간판 탓에 선뜻 식당에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소박한 간판 식당을 목격하면 들어가보기로 하고 다랭이마을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남쪽 바람을 맞으며 잠시 잠깐 낭만에 젖어드려는 찰나,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간식 말고 밥을 달라는 신호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드디어 배꼽시계가 알람을 우렁차게 울려댔다. 신속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는 대신,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잡고 ‘가장 가까운 맛집’을 물었다. “주변에 식당 자체가 얼마 없어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남해자연맛집이 전복죽으로는 꽤 괜찮아요.” 남해의 전복죽? 원하던 메뉴는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빨리 달려 7분만에 도착. 다행히 Break Time과 겹치지 않았다. “여기 전복죽 두 개요”를 외치며 식탁으로 향하는데 매우 인자한 표정의 사장님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개인적 사정으로 지금 문을 닫는단다. 울상을 하며 식당에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액셀을 밟아보기로. 가장 먼저 보이는 첫 번째 식당에 두말없이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이내 식당을 발견했다. 아무리 식사 때가 아니었기로서니 손님이 한 테이블도 없는 조용한 횟집. 전복죽이 메인 메뉴가 아닌 식당이었다. ‘맛있는 건 못 먹어도 맛없는 건 먹지 말자’가 내 평소 신조이건만 살짝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당기지도 않는 회를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이내 전복죽 두 그릇을 시켰다.

배고픈 자에게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전복죽이 세팅됐다. 적어도 새로 끓였다는 확신은 들었다. 한 수저 떴다. ‘간이 심심하네.’ 두 수저 떴다. ‘적어도 죽 전문점 수준은 넘어서네.’ 세 수저 떴다. ‘맛있다.’ 점점 속도가 붙었다. 동행자가 혹시라도 내 그릇을 탐낼까 꽤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웠다. 따뜻해지고 있는 구들장만큼 내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1만 5천 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음식점은 남해해월정횟집. 홍보 아니다. 궁금해할 독자 몇 분을 위하여)

뱃속이 따뜻해지니 자연스레 수다가 이어졌다. 동행자는 “역시, 밥은 배고플 때 먹어야 해”라며 무척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식사 시간이 되었다고 배고프지도 않는 뱃속에 무턱대고 음식을 주입하는 건, 식탐가나 할 일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맛집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다. 페이스북에 올려지는 수많은 맛집 탐방기, 배고프지 않을 때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만든 음식인 마냥 극찬을 아끼지 않는 맛집 블로거들. 이제 식당 주인들도 똑똑해져서 무조건 DSLR을 들이댄다고 서비스를 주지 않는다.

특히 해외 여행을 갔을 때. 내가 언제 또 이 나라를 와보겠냐며, 시간대별로 각종 음식을 맛본다. 배고프지 않을 때 먹는 음식은 제아무리 훌륭한 레시피를 가졌더라도 만족을 주기 어렵다. 나 또한 여행자의 의무인 마냥, 새로운 여행지의 낯선 현지 음식은 주저 없이 먹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 소량 주문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먹고 있는 각종 간식을 목격하면, ‘이 것도 먹어야 하는데’ 조급할 따름이었다.

전복죽을 만족스럽게 먹은 후, 떠오른 음식은 올 가을 늦은 휴가로 다녀온 비엔나에서 먹은 슈니첼(Schnitzel). 송아지 안심살과 같은 고기를 부드럽게 다진 다음 밀가루, 빵가루, 계란물을 입혀 기름에 튀긴 음식. 얇은 왕돈까스를 상상하면 되는데 조금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내가 선택한 곳은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1905년에 문을 연 슈니첼 전문 레스토랑 ‘피그물러’. 유일하게 줄 서서 기다린 끝에 들어간 곳이었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점원은 우리 일행을 끝으로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우리 뒷줄에 서있던 한국인 모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다. 모녀는 근처에 있는 2호점을 갔다가 다시 1호점에 와 우리에게 합석을 청했다. 동지애가 불끈 솟아 “좋다”고 답했지만, 이미 점원은 우리 일행이 2명인 것을 파악한 후에 줄을 끊은 것이었다. 짧은 영어로 설득을 하려던 차, 우리 앞줄에 있던 젊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또한 한국인.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점원과 쇼부를 쳤다. 다행히 모두가 큰 테이블에 다같이 동석할 수 있었다.

이윽고 기대하던 슈니첼이 나왔다. 접시가 좁다며 사방으로 튀어나온 슈니첼은 얇지만 양이 거대했다. 레몬을 살짝 뿌리자 느끼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배고팠던 우리 일행.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배가 다소 불러왔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한 조각 한 조각, 음미하듯 꼭꼭 씹었다. ‘역시 뭐든지 배고플 때 먹어야 해’라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감지됐다. 합석한 모녀와 젊은 청년. “기대보다 덜하다”며 예쁘게 조각 낸 슈니첼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이럴 수가! 우리도 작은 기대를 안고 온 곳인데, 기대 이상 훌륭한 음식이었단 말이다. 입맛 까다로운 내가 별 다섯 개를 줄만한 곳이었는데, 역시 그들은 배고픈 자들이 아니었다. 남김 없이 슈니첼을 비운 우리 일행을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비엔나의 유명한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추웠지만 ‘언제 먹겠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 간단한 디저트였지만 이미 배가 부른 우리에게 적당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차차, 우리 배부르지?

여행에서 기억에 남을 음식을 만나려면, 적어도 한 번은 쫄쫄 굶은 상태에서 맛집을 찾아야 한다. 다음 여행지에서도 우리는 빈 속으로 식도락을 즐길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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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나 미실, 이 언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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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내 소개를 하면 자신 역시 그렇다면서 반가워하시는 분들이 있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분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은 즐겁다. 그런데 역사 이야기라고 하면서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의 연애담이나 성적 에피소드를 나열하시거나 내게 물어 보시는 분들도 꽤 많다. 보통은 실재와 다른 부분이나 과장, 왜곡된 부분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대화를 이어가곤 하지만 어떨 때에는 듣기 불편할 때도 있다. 여성이나 동성애자들의 경우만을 희화화해서 이야기하는 경우이다. 아니, 전쟁하고 서로 죽이는 것이 문제지, 열심히 사랑하며 자신의 시대를 산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선덕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생물학적으로 처녀 여왕이든 아니든 도대체 뭔 상관인가? 이럴 경우, 나는 살짝 사악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정말 쎈 언니 한 분 소개해 드릴까요?”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책이 있다. 1989년 발췌본이, 1995년 필사본(연구자들은 이 책을 모본(母本)이라 부른다)이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이 책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김대문의 저서라고 언급만 되어 있을 뿐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는 책이었다. 그래서 1400여년이 지나 등장한 <화랑세기>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진위논쟁에 휘말린다. 발견된 <화랑세기>를 위작이라 주장하는 쪽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필사자인 박창화 선생의 한문 창작 소설로 본다. 다른 쪽의 연구자들은 박창화 선생이 직접 원본을 보고 필사했다고 주장한다. 박선생은 해방 직전 일본 궁내성의 도서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이는 쉽게 결론이 날 논쟁이 아니다. 결정적인 관련 유물이나 유적이 새로 발굴되거나, 일본 궁내성에 있을지도 모를 원본이 등장해야만 끝날 논쟁이다.

여하튼, 681~687년 경 신라 귀족 김대문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화랑세기>는 문노와 김유신, 김춘추 등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족보인 세계(世系)를 다루고 있다. 정식 혼인관계와 정식 출생자들의 족보뿐만이 아니다. 책은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이 속한 지배계층들을 설명하기 위한 모든 관계, 즉 왕과 왕비, 후궁들, 화랑의 아내들과 연인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정식 혼인관계와 비공식 사통((私通) 관계의 이야기를, 그리고 남녀뿐만 아니라 남남과 근친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온갖 성관계와 출생 이야기를 세세히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충격적인 신라인의 성 풍속 내용 자체가 위작이라는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400 명이 넘는다. 그런데 남성 풍월주 32명의 전기 형식으로 구성된 전체에 책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이름은 뜻밖에 유명 화랑이 아니라 한 여성의 이름이다. 또한 그 이름은 <화랑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미실(美室), 아름다운 집.

미실은 풍월주가 아니었기에 정식으로 <화랑세기>의 전기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화랑세기> 전 편에 걸쳐 다른 풍월주들의 전기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1세 풍월주 위화랑의 증손녀인 미실은 10세 풍월주인 미생의 누나였다. 5세 풍월주인 사다함과 7세 풍월주인 설화랑(혹은 설원랑)은 그녀의 연인이었으며 6세 풍월주 세종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11세 풍월주인 하종은 미실과 남편 세종 사이에 태어난 그녀의 아들이었고, 16세 풍월주 보종은 미실과 연인 설화랑 사이에 태어난 그녀의 아들이었다. 15세 풍월주 김유신과 18세 풍월주 김춘추는 각각 미실의 손녀 사위였다. 또 미실은 8세 풍월주 문노,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으로도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이 언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출처: MBC]


미실은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는 남자로 계승되는 성골 진골 등의 골품 외에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인통(姻統)이란 것이 있었다. 인통에 속한 여자들은 신라 왕실 남성들의 결혼 상대가 되거나 색공(色供), 즉 정식 혼인 외 성적 쾌락의 상대가 되어 지위를 획득했다. 446~550년경에 대원신통의 일원으로 태어난 미실은 외할머니 옥진의 지도 아래 진골정통에 맞서 가문을 일으켜야할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옥진과 미실에게 성행위란 곧 ‘도’였다.

옥진이 “이 아이는 우리의 도를 일으킬 만하다”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하였다. 미실이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진흥제 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하였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122쪽

진흥왕의 동생인 세종 전군에게 색공을 바친 미실은 시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미움을 사서 궁 밖으로 쫓겨 나간다. 이때 화랑 사다함을 만나 색공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다. 세종은 미실을 못 잊어 다시 궁으로 부른다. 이에 미실은 후궁이 아닌 정비(正妃)의 자리를 요구한다. 사랑에 눈먼 세종은 정비를 버리고 미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 되자 불편한 관계가 된 남편 세종을 변방으로 보내 버린다. 이후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색공을 하는 후궁으로서 30여 년간 신라 왕실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미실은 이모이자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왕후와 손잡고 진지왕 폐위와 진평왕 옹립을 주도하며 자신이 왕비에 즉위하려 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아 실패한다. 그 사이 왕 외에 화랑 등 다른 남자들과도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며 4남 4녀를 낳았다.

미실이 30년간 늘 탄탄대로로 권력을 행사한 것만은 아니다. 미실은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 태자의 죽음과 관련한 성적 스캔들에 휘말려 궁을 나오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곧 다시 왕의 총애와 예전의 권력을 회복한다. 친동생 미생과도 관계한 점 등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방탕했던 점 때문에 공격을 받자 화랑 조직을 개편하여 자신이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원화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위기를 타개해가는 과정을 보면 그녀가 단순히 미모와 성적 능력만으로 성공한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이 업무를 볼 때 미실이 문서를 보며 옆에서 모셨다는 점과 그 어려운 향찰로 향가까지 지었다는 점, 죽기 전에 수기 700권을 남겼다는 점으로 볼 때 그녀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존재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진흥제가 사도왕후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하였다. 사도왕후는 이에 미실을 3대(부ㆍ자ㆍ손)을 모시는 자리로 진흥제에게 추천하였다. (중략) 전주(미실)는 문장을 잘 지었다. 진흥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견하여 그것이 옳은지를 (다루었기에)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123쪽

이정도로 당시 신라에서 미실이 큰 권력을 행사했다면 미실은 고대 삼국역사에 매우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미실과 관계있는 다른 인물들은 위의 세 문헌에 모두 등장하는 반면, 미실은 오로지 <화랑세기>에만 등장할 뿐이다. 그 이유가 뭘까? 이런 미실의 존재가 바로 <화랑세기>가 위작이며 소설이라는 증거가 될까? 혹시 당대의 신라인 김대문이 신라 당시에 기록한 문헌에는 미실이 등장하지만 후대에 고려인 김부식과 일연이 기록한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점에 숨은 답이 있지 않을까? 즉 미실이란 존재는 후대의 유교적 도덕률로는 재단할 수 없는, 특수한 성윤리와 풍습을 가졌던 당시 신라 사회의 맥락에서만 이름이 남겨지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서양이건 동양이건 크리스트교와 유교의 승리 이전 고대사를 보면 성 풍습이 지금과 매우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 삼국 중에서도 특히 신라가 그랬음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74년, 신라 13대왕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굴되어 1978년에 국보 제195호로 지정된 ‘토우 장식 장경호'에 부착된 토우의 예를 들 수 있다. 이 흙항아리에는 후배위로 성교하는 남녀 한 쌍의 토우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를 왕릉의 부장품으로 넣었다는 데에서 신라인의 성의식과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박물관에 가 보면 남녀의 성기를 과장하거나 성행위의 체위를 표현한 신라의 토우가 얼마든지 더 있다. 또 문헌 자료도 있다. 유학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 옥문곡에 숨은 백제 군사를 소탕하는 고사가 등장하는데, 이야기 속 선덕여왕은 남자 중신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성교와 남녀의 성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분위기는 매우 자연스럽다. 이런 예를 보아 당시 신라인의 성 풍속은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윤리도덕의 잣대를 가지고 <화랑세기>와 미실을 재단하려 들면 안 된다. 아무리 낯 뜨거워도 이 역시 우리의 역사이고 아무리 충격적이어도 미실 역시 우리의 선조이다.

물론 <화랑세기>가 위작이어서 우리의 미실이 박창화 선생의 창작 속 인물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실이 허구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화랑세기> 속 고대 신라 여성 미실의 이야기를 읽는 현대인인 우리는 그녀의 거침없는 삶과 욕망 추구에 어느 정도 문화 충격을 받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에겐 충격적인 성적 에피소드가 얼마든지 있다. 남편이 있는 몸으로 스스로 이모의 남자인 진흥왕의 후궁이 되는 것, 진흥ㆍ진지ㆍ진평 등 3대에 걸쳐 왕의 후궁이 되는 것, 30대에 10대인 진평왕을 몸으로 성교육 시키는 것, 자신의 딸과 동시에 한 왕인 진평왕에게 색공하여 각각 딸을 낳는 것, 진흥왕이 병에 걸려 성불능이 되자 이모 사도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남편 세종을 사도왕후와 동침하게 권하는 것, 친동생 미생과 관계 갖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실, 그녀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말초적인 성 관계 에피소드보다 다른 곳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미실의 상대 남자들도 같이 받아야 한다. 즉 제수씨이자 처조카를 후궁으로 삼은 진흥왕도, 미실 모녀와 동시에 동침한 진평왕도 같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권력자 남성의 성생활은 비난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덕이나 문란한 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 당시 신라에는 임신한 처(妻)를 상관에게 바쳐 이득을 꾀하는 마복자(磨腹子) 제도라든가 남성의 성 상대인 용양신(龍陽臣) 제도 등 남성과 관련되어 현재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성 풍습도 많았다. 사회 자체가 그랬기에 미실 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미실 정도의 성편력을 행한 여성은 얼마든지 더 있다. 색과 성을 무기로 권력자 남성 옆에서 방자하게 굴거나 친정 세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행사한 여성의 예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미실의 경우만 더 불편한 것일까? 왜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고 싶을 정도로 책 전체에 걸쳐 미실이란 존재가 가장 걸리는 것일까?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중략)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89쪽

미실은 나이 들자 색공과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고 영흥사에 거주한다. 애인 설원랑(설화랑)이 그녀를 따라 온다. 미실이 병에 걸리자 설원랑은 지극한 사랑으로 그녀를 간호하다 먼저 죽는다. 미실 역시 58세의 나이로 설원랑의 뒤를 따른다. 이것이 <화랑세기>에 서술된 미실의 최후이다. 어떤가? 미실의 성 편력 부분보다 이 부분이 더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미모와 성적 매력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아 베갯머리 송사로 권력을 휘두른 여성으로는 장희빈이나 정난정도 있다. 높은 신분 출신으로 상대 남자들을 가리지 않고 친척 관계의 남성들과도 성을 즐긴 여자로는 어우동도 있다. 미모로 높은 지위과 권력을 누린 외국 여성들을 찾아보면 양귀비나 앤 불린도 있다. 이들과 미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앞서의 언니들은 모두 비극적으로 죽었다. 심지어 장희빈과 앤 불린은 믿고 사랑하던 남편인 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지만 미실은 끝까지 사랑받다가 자연사했다. 사람들이 미실의 삶을 볼 때 가장 불편한 점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희대의 악녀이자 음녀인데, 권선징악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누릴 것 다 누리고 받을 사랑 다 받고 살다가 해피엔딩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점. 미실, 그녀의 삶을 읽는 후대의 우리들은 그녀의 방탕과 권력욕보다 그렇게 살던 그녀가 아무 천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불편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실을 등장시킨 현대 드라마 <선덕 여왕>에서는 미실을 자살로 처리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해피엔딩,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불편했기에.

<화랑세기>의 진위를 떠나 이미 미실은 소설로 드라마로 생명력을 얻은 대중적 캐릭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실, 그녀의 존재와 삶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작업이다. 미실, 과연 그녀는 어떤 기준에서 악녀이고 음녀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가? 사람들은 왜 마음껏 성과 욕망을 추구한 여성은 악녀이므로 반드시 파멸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미실 시대의 성도덕이 현대와 달라 불편함을 느낀다고 그 시대의 기록물이 위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민족의 역사는 항상 현대 후손의 시각에서 바람직하고 이로운 것만 정사(正史)로 채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화랑세기> 속에 그려진 우리의 고대 신라사와 미실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 바로 거기에 민족사와 여성을 보는 우리의 편견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자인 우리의 세상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한다.

내가 <화랑세기>에 대해 처음 들었던 때는 1989년, 고교 고전문학 시간이었다. <화랑세기> 발견 소식을 신문에서 읽으신 선생님께서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수업진도 안 나가는 것만 좋아서 신문이 말하는 놀랄만한 성 풍습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아마 당시의 나는 <테스>의 비극이 순결을 잃은 탓이라고만 생각하던 여고생이었던가. 대학에 들어가고 1995년, 부산에서 모본이 발견되었다. 진위 논쟁이 이따금 신문에 실리는 것을 읽었다. 1999년, 이덕일 이희근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 에 화랑세기 위작 논쟁이 소개된 것을 읽고 흥미를 느껴 그 책에 몇 달 앞서 발간된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를 찾아 읽었다. 난 미실이란 언니에게 단박에 매혹당했다. 이어 2003년 <이덕일의 여인 열전> 속의 미실과 2005년 김별아의 소설 <미실> 속 미실을 만났다. 2009년에는 드라마 속의 미실을 만났다. 미실은 이런 과정으로 1400년 전의 <화랑세기>에서 걸어 나와 현대 여성인 나와 만났다. 나는 왠지 지금까지 나의 성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 언니와 같이 걸은 느낌을 갖는다. 아, 미실과 그녀의 삶이 비난받는 것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혼자 상처받기 일쑤였던 나에게 미실은 어떤 말을 해 주었던가.

여자는 언제 여자가 되는가. 미실이 묻는다. 나는 머뭇거린다.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실은 말한다. 여자의 생식기를 갖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여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내보낼 수도 있는 열린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자는 여자가 된다. 그러니 여자인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사랑할 것. 그 과정에서 남의 시선과 징죄를 지레 상상하고 겁먹지 말 것. 세상은 나쁜 여자가 받을 벌을 말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끝까지 자신을 잃지 말고 너가 갈 길을 가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 미실, 그녀가 계속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가 파멸한다는 것은 역사의 루머일 뿐이다. 언제까지나 첫 생리혈을 본 어리버리한 소녀의 두려움으로 세상의 시선을 겁내며 움추려 살 수는 없다.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나 미실, 이 언니를 보라. 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편집자 주 : 한국의 시오노 나나미를 꿈꾸는 '박신영의 이 언니를 보라'가 매월 첫번째,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 님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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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윤모 아저씨의 성추행 관련 뉴스를 인터넷 매체에서 읽다가 흥미로운 댓글들을 발견했다. 그가 여성에 대하여 ‘중세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비판 댓글이 많이 달렸던 것이다. 왜 우리는 여성들에게 나쁜 상황이 벌어지면 현시대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세적 상황이라고 하며, 그런 짓은 중세 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할까? 여성들이 살기에 지금은 중세와는 완전히 다른, 살기 좋은 시대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일까? 아, 궁금하다. 추가 댓글 달고 싶어라!

비슷한 경우가 더 있다. 첫 책을 낸 후, 책 읽는 여자, 역사 에세이 쓰는 여자로서의 나란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할 때가 종종 생긴다. 자연스레 나의 개인적 경험을 말하게 된다. 늦은 밤 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책 읽고 있는 나에게 “니 까짓게 여자 주제에 책을 읽어?”하며 시비 거는 술 취한 아저씨를 만난 일이나 아침에 들어간 가게에서 “안경 쓴 여자가 첫 손님으로 와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경험 등등… 그런데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열에 일곱은 이런 불편한 반응을 내게 보인다. “진짜야? 세상에, 요즘에도 그런 일이 있어? 조선 시대도 아닌데?” 심지어는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요즘이 중세냐? 어디 달나라 갔다 왔냐? 피해의식에 쩔어 겪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는군! 너 꼴페지?” 얼마전 내 인터뷰 기사에도 그런 댓글이 달렸다. 아, 못 참겠다. 답 댓글 달고 싶어라!

아, 안심하시라. 친구들은 내가 댓글 단 사람들과 볼썽사납게 싸워댈까봐 걱정이시지만, 학구적인 난 단지 궁금해서 그분들께 정중히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중세 여성사에 대해 어떤 책을 읽으셨어요?”


서양사에서 중세 시대(Middle Ages)란?

서양사에서 중세 시대(Middle Ages)란 보통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 때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1453까지의 약 천 년에 달하는 시기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시기, 혹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세가 끝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서양의 중세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는 3대 명저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 블로흐의 <봉건사회>와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 그리고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사람들>. 하지만 중세의 여성들에 대한 본격적인 저작물들은 비교적 늦은 시대인 1980년대 즈음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여성사 연구는 주로 여성의 참정권 획득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근현대사 위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중세 여성사가 학자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그 성과가 일반 독자들에게 논문 아닌 대중적 역사서들을 통해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세의 여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영화나 역사 소설 등에 그려진 대중적이고 약간 흥미 위주로 변형된 이미지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아내 구타>독일, 1456년, [출처 :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325쪽 삽화]


‘남편이 아내를 때릴 권리’가 있었던 중세

물론 현대 여성들에 비해 중세 여성들의 처지가 모든 방면에서 훨씬 열악했음은 굳이 두꺼운 역사책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중세기 거의 모든 나라의 법전에는 공식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때릴 권리’가 명시되어 있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서양 중세를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 갖는 암흑기의 이미지는 서양 중세를 지배한 종교인 가톨릭에서 유래하듯이 서양 중세의 여성을 떠올릴 때 공통적으로 갖는 불행과 억압의 이미지 역시 가톨릭에서 유래한다. 서양 중세 사회에서 법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고 여성의 열등함을 규정짓는 근거는 교회법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법은 여성 차별의 근거를 여성이 남성보다 늦게 창조되었으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에게 원죄를 짓게 했다는 점에 두었다.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가치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개적으로 규정지었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대단한 현실적 억압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기 구분에서 중세는 고려시대였다. 하지만, 앞서 윤씨 아저씨의 기사에 고려 시대가 아니라 “지금이 조선시대냐?”라는 댓글이 달린 것으로 보아 여성 차별에 있어서 시대를 거론하는 것은 단순한 연대 구분이 아니라 그 시대의 현실을 지배하는 강력한 차별 이론의 존재 유무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서양 중세 여성사의 좋은 길잡이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서양 중세 여성사의 좋은 길잡이이며 제목부터 중세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를 느끼게 해 주는 책으로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가 있다. 중세 유럽 사회는 세 위계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성직자, 전사, 농민)’라는 사회적, 직업적 신분 체계이다. 얼핏 보기에 ‘제 4신분’이라는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은 중세 여성이 앞의 세 신분 아래에 놓인 최하층의 신분이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마 중세 여성에 대해 현대인인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이미지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저자인 슐람미스 샤하르는 신분이나 지위, 직업을 초월하여 ‘중세 여성을 하나의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 호기심 유발을 했을 뿐이다.

저자는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다양한 계급에 속하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중세 서유럽 여성들의 삶을 방대한 문헌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중세의 여성은 별개의 차별받는 한 신분이었다기보다는 귀족 여성이건 도시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한 여성이건 농민 여성이건 수녀이건 이단 분파에 속한 신앙 운동을 한 여성이건… 각각 속한 사회적 위치에서 같은 위치의 중세 남자들에 비해 모두 하층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체적으로 같은 억압을 받는 중세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의 여성들이 처한 계급, 사회 경제적 지위와 개인적 상황에 따라 각각의 여성들이 받는 중세 봉건적 억압의 정도는 모두 달랐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다 억압받았던 것도 아니다. 영지를 상속할 권리를 가진 귀족 여성의 경우, 현대의 어느 여성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하며 살기도 했다. 또 교회와 법은 남녀의 차이와 차별을 인정했지만 중세 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른 노동 분화는 거의 없었다. 여성 농노들은 남성 농노들 못지 않게 힘든 노동을 견디고 영주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녀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계층에서도 의무 이행 정도와 상관없이 여성의 권리는 남성의 권리보다 보장되지 않았다. 바로 이 점만이 중세의 모든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제 4 신분’이라 묶을 수 있는 공통 요소이다.

[출처 : 구글]

자, 그랬다. 중세 여성들은 확실히 당시 남성들에 비해 차별받았으며 힘들게 살았다. 그렇다면 현대 여성들은 모두 중세의 그녀들과 다르게, 더 잘,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위의 책에서 저자가 각종 자료들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 낸 각계각층 중세 여성들의 삶을 읽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랍쇼? 지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네?”


여성의 처지는 중세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남성들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그때만 여성 임금이 오르고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는 1,2차 세계대전 시기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중세 흑사병 창궐 이후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도시의 남성 노동자들은 그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같은 직종에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이는 근대 산업화 초기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종사하는 남녀 노동자들의 갈등을 서술한 문장이 아니다. 중세 내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하는 여성들은 집 밖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는 또 가사일을 해야 하는 이중 노동에 시달렸다. 이는 현대의 직장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세 여성 농노들이 처한 안타까운 처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이나 중세나 별다른 것이 없다. 심지어 드라마에 빠진 현대 여성들과 중세의 궁정풍 문학과 로맨스 시가에 빠진 중세 여성들도 거의 같아 보인다. (현실을 떠난, 현재 내 옆에 있는 남자와 다른 남자와의 낭만적 사랑을 꿈꾼다는 것은 이상적인, 다른 질서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일부의 남성들이 비판하듯 여자들의 머리가 비어서 돈 많고 능력있는 미남들 보며 헬렐레 좋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세 시대는 모든 여성들에게 깜깜한 암흑기였을까?

그런데 이런 중세 역사서에 드러난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여성에 대한 당대의 1차 사료들은 거의 다 남성 기록자가 그들의 가치관에 근거한 시각으로 보고 걸러서 기록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재판하고나서 남성이 남긴 기록, 남성의 수녀원 방문 기록, 남성의 편지, 남성 시인이 쓴 기사도 문학… 이런 기록물들을 그대로 옮겨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 역사란 언제나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것은 기록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 사고 기록물에 등장하지 않는, 일하고 사랑하며 사는 평범한 중세 여성들의 삶 역시 가혹한 차별과 고난의 연속이었을까? 중세 시대가 당시의 모든 여성들에게 내내 깜깜한 암흑기였을까? 어차피 역사란 완전히 객관적인 기록물이 될 수 없다. 그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후대에 사는 역사가의 현실적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에서 목적 의식을 갖고 쓴 역사서가 더 객관적이고 훌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 현장 상황만 동영상으로 찍어 객관적으로 전달한다면 안중근 의사도 윤봉길 의사도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리지 않은가. 한일 관계와 지난 역사를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이 그 동영상에 없다면 말이다. 자, 그렇다면 여성 저자의 의도가 대놓고 내레이션으로 들어가 있는, 다른 중세 여성사 책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여인들>이다.


여성 저자가 쓴 중세에 살던 여성 이야기, <중세의 여인들>

이 책은 <중세의 사람들>을 쓴 아일린 파워의 중세 여성에 대한 짧은 논문과 강연 모음집이다. 논문 모음집이라는 책의 성격상, 이 책은 완벽하게 체계를 갖춘 중세 여성사 입문서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 여성사 연구에 있어서 이 책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그 이전까지는 연회장에서 논하던 역사를 ‘부엌에서’ 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저자의 <중세의 사람들>원문 19쪽에 'The great historian now takes his meal in the kitchen' 이라 서술한 부분을 이용한 표현임을 밝힌다.) 즉, 저자는 유명한 남성 영웅의 전쟁사 위주였던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시선을 돌려 평범한 농민의 일상사를, 부엌의 주인공들이었던 여성들의 역사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도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합심해서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중세의 여인들>에서 저자는 우선 중세의 여성관을 언급한 후 귀족, 향반(젠트리), 중산층,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들의 삷을 골고루 다뤄준다. 중세 여성의 교육과 중세의 수녀원에 대해서도 말한다. 경제사회사 학자인 저자의 서술 방식은 과부 여성의 유언장을 분석하여 그녀의 가정사와 그녀가 관리하던 장원의 이모저모를 재구성하는 식이어서 어떻게 보면 시시콜콜해 보이기도 하지만 읽다보면 어느덧 '중세를 살던 그녀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장점을 가진다. 물론 그녀들의 삶은 같은 계층의 남성들에 비해 고되고 힘들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냥 객관적인 중세 여성사 관련 자료를 제시하는 사이사이 자신의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독자인 나에게 읽다보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달해 주는 점이었다. 저자는 그냥 중세 암흑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도 사람 사는 세상, 서로 사랑하고 노력하는 남녀가 합심해서 살아가는 세상이었다고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를 담아 서술해주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에는 여성에 대해 한편으로는 완전 복종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숭배하는 양극단의 사상이 정식화되어 다음 세대에 유산처럼 물려지게 되었다. 이 두 사상은 중세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로도 여성의 존재를 규정하거나 변화시켰다. 하지만 어느 하나가 중세의 보통 남자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위치는 이론적 개념에 의해서만 정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들의 불가피한 힘과 일상생활에서 쌍방의 타협 등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객관적 사실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었으며, 대체로 남녀 간에 형평을 이루는 것이었다.
중세의 남자는 여자 없이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다. 가정의 안락을 위해서 여성에게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여성이 그의 일을 대신 맡아 하였고, 그 어느 시대보다 중세의 여자들이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실제로 남녀 간에는 동지의식 같은 것이 존재했다.
-<중세의 여인들>본문 68 ~ 69쪽에서 인용
또 저자는 억압받는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그리지 않는다. 아무렴, 중세나 지금이나 다 사람들마다 성격이 다른 법인데, 중세 여성이라고 닥치고 울면서 순종만 했을까. 이런 신나는 일도 있었단다.

링컨 교구의 한 수녀원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교가 수녀원을 방문하여 보니파키우스 교황의 회칙을 한 부 전하면서 수녀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수녀들은 격분하여 주교가 말을 타고 수녀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 따위 규정은 지킬 수 없다고 소리치며 회칙을 집어던져 주교의 머리를 맞혔다.
-<중세의 여인들>본문 179쪽에서 인용
이런 서술은 페미니즘과 여성 참정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저자의 이력과도 관계있다. 저자에 대해 맥신 버그가 쓴 전기인 <A WOMAN IN HISTORY : Eileen Power, 1889 - 1940>를 보면, 비교적 여성사학자가 드물었던 시기, 1928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받았던 시기에 보수적인 영국 사학계에서 여성 사학자로서 저자가 그녀의 시대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저자의 개인사와, 저자가 쓴 중세 여성사를 같이 읽으면서 역사에 대한 가치 판단은 평가하는 사람들이 속한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 그리고 같은 시대라도 각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회 현실에서 접하는 모든 현상에 대한 평가 역시!

[출처 : 아마존 서점]

간단히 말해서 중세의 특징적 여성관은 교회와 귀족 계급이 그들의 사상을 사회에 일방적으로 부과하던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만약 여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더라면, 아마도 지배적 도그마는 달라졌을 것이다. 부유한 도시 중산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더라도 도그마는 다소 달려졌으리라. 교회와 귀족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나 지배적이었지만 다른 목소리들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여인들>본문 34 ~ 35쪽에서 인용

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그렇다. 어느 시대나 억압은 있었고, 또 그 억압에 굴하지 않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차별도 있었지만 연대도 있었다. 하긴, 중세가 여성의 암흑기라는 것이 현대의 일반 독자인 우리에게 직접적으로는 뭐가 문제겠는가? 그렇게 규정짓는 이면의 시선이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지으면서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이성을 과시하려는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 계몽주의자의 시선을 본다. 자신들의 시대는 전 시대와 다르다는 것, 자신은 각성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남성들은 역사상에 늘 있었다. 그러므로 “요즘이 중세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는 시대와, 자신의 진보성에 대한 우월감이 깔려 있다. 현대는 중세와 다른 시대이며 현대에는 이런 일이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편견을 담아 그런 말을 할 때, 피해를 당한 여성의 문제는 이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열등한, 혹은 운 나쁜 그녀만의 개인적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되어 그녀의 사생활이 공격받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모든 여성에게는 그녀가 처한 각각 현재의 상황이 모두 다 그녀의 온전한 시대이다. 어떤 끔찍한 일이 현대에는 0.01%의 확률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그런 일을 겪은 한 여성에게는 그 현실이 그녀에게 100%로 발생한 유일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는 중세에 사는 여성도, 조선에 사는 여성도, 21세기에 사는 여성도 다 존재한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그릇된 시각이 중세에만 있고 현대에는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세 여성이라고 다 불행했던 것도 아니고 현대 여성이라고 다 자신의 시대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또 여성에게 유리한 것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리를 꾀하는 얌체족 여자도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이건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치는 있으며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의 가치라는 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중세 여성사 책들에 손을 얹고 얼치기 중세의 마녀처럼 내가 책에서 만난 중세의 여성들을 불러본다. 언니들, 이 무지한 동생에게 인생의 지혜를 나눠 주세요. 제가 읽고 고민하고 쓰고 있는 것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향 연기 사이로 한 언니가 등장한다. 너희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중세적이란 말에는 너희의 우월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기분 나빠. 다른 언니가 말한다. 현대에 살면서 중세적 사고방식을 일관성있게 가진 아저씨는 사실 별로 위험하지 않아. 정말 위험한 남자는 여러 시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현재 자신의 이익에 맞게 그때그때 사용하는 남자야. 또 다른 언니가 손을 내저으며 급히 말한다. 아니, 남자뿐만 아니야. 모든 시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관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문제야. 그러니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세니 조선 시대니 종북이니 좌빨이니 꼴페니 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사람들에 주의하라. 다른 언니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 안에서 열심히 산 존재들이다. 너도 시대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인간과 삶의 진실을 보라. 각각의 인간은 각각 다른 시대에 살 수 있고 그 시대나 환경의 한계에 신음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면에서나 개인적 면에서나 자신들이 처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성장해야 한다. 조용히 듣던 아일린 언니가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한 마디 한다. 그리고 어떤 상처를 받든지 절대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생각하지 마. ‘봉토들은 결혼을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한다(<중세의 여인들>본문 54쪽에서 인용)’라고 내가 이미 말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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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된장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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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릴적 일본 작가의 만화책 <베르사유의 장미>와 티비 만화 영화로 만났던 예쁜 소녀 왕비?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와 주변의 다리 긴 귀족 남자들? 중고생이 되어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을 배우면서 알게된 그녀의 부정적 모습? 왕비의 사치와 낭비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대중 역사서의 서술들? 혹은 빵을 달라고 행진하는 굶주린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하고 했다는 그녀의 세상 물정 모르는 아둔한 발언을 먼저 떠올리는지?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현재 아무 연고 없는 우리나라에서 과시적 소비 성향을 보이는 일부 여성들을 공격할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한다. 세상에, 220 여년 전의 프랑스 왕비가 머나먼 타국에까지 와서 ‘골빈 명품족, 된장녀“의 원조 언니가 될 줄이야!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한 장면



변호 1, 프랑스 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벽 때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는 1755년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정략 결혼으로 14세에 프랑스의 왕세자빈이 되면서 그녀의 이름은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느’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바뀐 이름에 걸맞게 처신하지 못했다. 1774년 남편 루이 16세의 즉위에 따라 프랑스의 왕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치, 향락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편애로 그녀는 베르사유 궁 내부와 프랑스 전체에서 적을 만들었으며 재정 적자의 원흉으로 여겨지고 선정적 비방 팜플렛의 공격을 받았다. 누적된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루이 16세는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하지만 이는 오히려 구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는 의원들을 결집시켰다. 이어 결성된 국민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추진하고, 그해 7월 14일 성난 민중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드디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민중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영주의 성을 공격한다. 10월, 빵을 요구하는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를 습격해 튈르리 궁으로 왕실 가족들을 이송해 온다. 도주하다가 바렌에서 잡힌 왕실 가족들은 더욱 악화된 여론의 비판을 받는다. 이후 탕플 탑에 유폐당하던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각각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정적 이미지는 그녀의 사치와 낭비벽에 기인한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녀는 사치품 구입이나 사적인 거처 꾸미기, 도박빚 등으로 왕비 연금을 탕진하고 왕에게 손을 벌렸다고 한다. 다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던 재정 위기가 알려진 대로 순전히 그녀의 사치 탓인 것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지출은 늘 수입의 1.2배가 넘는 적자상태였다. 하지만 혁명 전해인 1788년의 궁정 경비는 프랑스 정부 총지출의 6%에 불과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지원하는 등 전쟁과 외교 관련한 지출이 25%, 기존 국가 부채의 이자에 대한 지출이 50%였던 것에 비하면 왕비의 낭비로 인한 왕실의 지출은 재정 위기의 전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또 도박빚으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그녀의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빚이 더 많은 액수였다.


변호 2,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진실

하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풍문으로 들리는 그녀의 사치, 낭비벽을 과장해서 받아들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1785년에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다. 사건은 빚을 내어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여 목걸이를 만든 보석상들이 이자에 쪼들려 급히 목걸이의 판로를 찾던 데에서 시작한다.

루이 16세가 즉위한 뒤, 왕비가 보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보석상들은 희망을 품고 왕을 알현했다. 왕은 왕비에게 목걸이에 대해 의향을 물었다. 당시 보석상 마야르와 우아니는 이 목걸이를 160만 리브르 정도 나가는 것으로 감정했다. 왕비는 이 값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보석상 뵈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왕에게 간청했다. 루이 16세는 왕비가 원한다면 사줄 뜻이 있었다. 하지만 왕비는 의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보석보다 배 한 척이 더 필요합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와네트 신화> 주명철 저 / 책세상 (p.179)
왕비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구입을 거절했건만, 보석상들은 포기하지 않고 왕비와 친하다고 거짓말하고 다니는 라 모트 백작부인에게 판매 중재를 부탁한다. 백작부인은 왕비가 구입한다고 속여 프랑스 고위급 성직자인 루앙 추기경을 보증인으로 세워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한 후 해체, 팔아 넘긴다. 예정된 날짜에 목걸이 대금이 지불되지 않자 초조해진 보석상 주인은 왕비에게 직접 찾아가게 되고 이제야 자신이 사기사건에 연루된 것을 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노한다. 곧 공개재판을 통해 왕비의 억울함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이 사건과 관련한 소문과 비방문, 재판 과정을 중계한 인쇄물이 세상에 널리 퍼진 후였다. 인쇄물들을 접한 민중의 정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였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여론의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적자 부인(赤字夫人, madame deficit)’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이 별명은 그녀에 대한 대중의 평판을 굳혀서 이후 그녀의 재판과 사형 언도 과정에 있어 ‘프랑스의 왕비’라는 이름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비제 르브룅 그림



변호3,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정 때문에 과도한 공격을 받았다

‘적자 부인’과 더불어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또다른 별명은 ‘오스트리아 계집‘이다. 이는 그녀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오면서부터 붙은 별명이다. (원래는 그냥 ’오스트리아 여인‘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Autrichienne‘라는 프랑스 단어다. 그러나 단어 뒷부분의 발음이 ’암캐‘에 해당하는 ‘chienne’이어서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발음했기에 국내 번역자들은 경멸의 의미를 담아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번역한 듯싶다.) 당시 유럽 왕가들은 정략 결혼을 통해 국익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대대로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사돈이 되곤 했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안 도트리슈와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시집왔다.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시집온 이들 공주들 역시 정략 결혼의 희생자들이었건만, 오랜 적대국을 바라보는 일반 프랑스인들이 그녀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들 동맹국이면서 경쟁국이자 가상 적국의 공주 출신 왕비들은 늘 친정과 내통하는 반역자라는 의심을 받곤 했다. 하지만 이는 외국에서 시집온 왕비라면 감수해야할 의례적인 모욕이었다. 반드시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 받는 모욕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후에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가 되는 마리 루이즈 역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마리 루이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빠의 손녀딸이다.

물론 역사 기록은 말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자신과 왕실 가족을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외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과 결탁하여 대 프랑스 전쟁을 부추겼다고. 이렇게 보면 그녀는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려한 반역죄인이 된다. 그러나 이 또한 현재의 시각에서만 본 과도하고 부당한 평가이다. 당시 유럽에서 국가란 한 왕가의 사유재산이어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리거나 용병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자국의 백성보다 외국의 지배자들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근대 민족 국가의 개념이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도 한참 지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였다.

그리고 비록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그녀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왕가들이 대 프랑스 동맹을 맺고 전쟁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는 공화국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의 군주들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공화체제를 막고 왕정이 유지되도록 최소한만 도우면 되는 것이지, 어떤 루이가 죽고 어떤 루이가 프랑스의 왕위에 앉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이름은 루이 오귀스트,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탕플 감옥에서 죽는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의 이름은 루이 샤를, 후에 왕정복고 시기에 루이 18세로 즉위하는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의 이름은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 다 ‘루이’이다.) 그러므로 외국 출신 왕비의 존재 자체가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얼른 사형시킨 것도 아니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 당시 실질적으로 큰 위험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과도한 공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월드에서 친정 운운하는 말을 듣는 것은 한 여자에게 너무 가혹한 법이다.


변호 4,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는 루머

적자 부인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는 별칭 말고 그녀에 대한 나쁜 평판을 퍼트린 문장이 있다. 이는 머나먼 아시아에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녀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 말이다. 바로 그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란 말! (원문은 ”lls n'ont pa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로 케잌 대신 브리오슈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을 요구하는 굶주린 민중들에게 결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혁명군은 고의적으로 이 말을 퍼뜨렸다.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오기 전인 1766년 경 루소의 저작에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 출신 왕비였던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가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말을 듣고 동정하여 파이 껍질이라도 주라고 한 데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0월 행진 “빵을 달라”고 행진하는 파리 여성들 삽화

이 발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이른바 ‘10월 행진’이다. 이는 1789년 10월, 6000~ 7000명에 달하는 파리의 하층 계급 여성들이 물가 상승에 항의하며 빵을 달라고 베르사유로 행진한 후 왕실 가족들을 마차에 태워 파리로 호송한 사건을 말한다. 1788년에서 89년에 걸쳐 프랑스에 가뭄과 폭풍으로 흉년이 들었다. 밀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여 파리의 빵값은 나날이 올랐다.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지주나 귀족 등 일부 계층은 곡물을 매점매석해 큰 이익을 보았는데 왕은 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프랑스 왕가의 시조가 되는 위그 카페는 파리 백작 출신이었기에, 프랑스 왕들은 대대로 파리 시에 빵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10월 행진’ 당시 민중들은 왕실 가족들을 파리로 호송하면서 “빵집 주인과 빵집 마누라, 빵집 아이를 데려간다‘고 외치며 왕실을 조롱했다.

이런 기본적인 ’빵집 주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기본 죄악에다가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비록 루머일지라도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불러 일으켜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 말은 제대로 고증하지 않은 대중 역사서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공주병 왕비의 무식한 발언으로 말이다. 하지만 폭도들의 습격으로 자녀들과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마당에 여유롭게 그런 발언을 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한마디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발언은 허구이지만, 그런 루머가 의심없이 널리 퍼질 정도로 평소 그녀의 평판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었다. 화려한 생활을 즐기던 그녀는 결코 왕비로서 자신의 나라의 가난한 백성에 대한 의무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죄라면, 그녀의 무지함과 미성숙함이 죄였다.



영화1,2.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두 장면 캡쳐 화면.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달콤한 케이크와 구두를 탐닉하는 미성숙한 소녀로 묘사된다.
그녀의 불안한 존재를 표현하듯, 비단 구두 사이에 21세기 소녀의 운동화도보인다.



변호 5, 마리 앙투아네트가 받은 모욕, 포르노그라피 팜플렛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녀의 성적 비행을 공격하는 포르노그라피 인쇄물들이 정치 팜플렛의 일종으로 나돌았다. 이런 인쇄물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루앙 추기경을 비롯한 남자들은 물론 동성 여자 친구인 랑발 공작부인, 폴리냐크 백작부인과도 성관계를 갖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은 그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인 공격을 담은 정치적 팜플렛은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에도 있었다. 루이 16세의 전왕인 루이 15세 시절에는 왕의 정부인 마담 퐁파두르와 마담 뒤바리가 주로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에 등장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잠시 사라졌던 이런 팜플렛은 나폴레옹의 첫 황후인 조제핀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왕의 주변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의 본 목적은 군주제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왕정 시기였기에 왕에 대한 공격은 왕이 아니라 왕 주변의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왕비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혁명기 평등 사상의 유포와도 관련이 있었다.

왕비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사회와 정치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논평하는 것 이외에도 민주적 효과, 혹은 평등화의 효과를 지녔다. 그것은 왕비의 육체가 왕권에 접근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그녀는 왕과 결혼했고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였으며 따라서 그녀의 육체는 권력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1789년 이후에 나온 포르노그라피는 모든 사람이 왕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예컨대 감옥에 있을 때조차 그녀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시종과도 잠을 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왕권을 비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민을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린 헌트 엮음 / 책세상 (p.401~401)

<단두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하는 음란 풍자시 등 음란물 문학과 포르노그라피 판화는 절대 왕권이 갖는 왕과 왕비와 신성함에 흠집을 내면서 프랑스 왕정의 기반을 잠식해갔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이후에 역사학자들이나 하는 것. 당시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여자로서 견딜 수 없는 모욕에 처하게 된다. 1793년 10월, 사형직전 이틀 동안의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짓지 않은 죄까지 모두 추궁당한 것이다. 왕과 왕비에 대한 재판에서 각자에 대한 죄목은 달랐다. 루이 16세는 정치적 범죄만 추궁당했지만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일으키고 친정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끌어 들이려한 반역죄뿐만 아니라 짓지도 않은 성적, 도덕적 범죄까지 추궁당했다. 그 증거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동안 유포된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이었다.

그러나 사치와 낭비 등 재정과 관련된 부분은 그녀만의 죄가 아니라 전대부터 누적된 경제적 문제였으며 그녀의 품행과 관련한 루머는 군주제에 대한 공격의 의미였지만 당시 민중과 재판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경박한 남녀들과 어울려 왕비답지 않게 유흥을 즐기던 그녀의 모습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지은 죄 이상으로 벌을 받은 면이 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근친상간 죄목까지 뒤집어쓰지 않았는가! 아무리 구체제에 대한 공격의 의미라 해도, 이는 역사 속의 한 개인, 한 여성으로서, 한 어머니로서 확실히 너무 가혹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모든 가혹한 사건을 겪으며 뒤늦게 왕비다운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계속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왕과 달리 그녀는 왕비로서 위엄을 갖고 혁명 이후에 발생한 상황에 대처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을 때까지.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 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중략)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인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나간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연극이 진지한 현실로 바뀌어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왕관을 빼앗을 때 비로소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짜 왕비가 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저 / 청미래, (p.10, p.118)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는 과연 무엇?

어쩌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결함은 일반인이라면 그냥 사람 좋고 허점 많은 호인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비라면 이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정부의 체제는 절대 군주정이었다.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부여 받았다는 이런 절대 왕정의 근본적 약점은 국가가 왕위를 물려받은 군주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선대의 루이 14세 시절 절정이었던 군주 개인에 대한 존경은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 시절에 이르러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위기에 대한 왕의 개인적 대처 능력의 차이로 인해 왕은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의 개인적 결함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져 공격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격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이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역사에 맞춰 제때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죄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삶과 그에 대한 평가와 논란을 다룬 역사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두 집단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사건의 본질을 보면 이는 표면적 모습과 달리 실은 한 집단 내부의 갈등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다시말해 A집단과 B집단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보면 사실은 A집단 내부의 계급적 문제라는 것.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에 대한 지나친 공격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여자에 대한 남성의 성적인 공격만도, 외국 공주에 대한 민족주의적 발로의 공격만도 아니었다. 프랑스 절대 왕정과 구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이 그런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그녀가 여성이기에 더 악랄한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이후 여성 참정권 제한 등 프랑스의 여성 차별 역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명품족과 된장녀와 김치녀 논쟁이 나온 진짜 이유

마리 앙투아네트가 원조 명품족에 된장녀로 한국에서 거론되는 현실에 맞게, 지금의 한국 현실도 한 번 돌아보자. 인터넷에서 ‘된장녀’,‘김치녀’에 대해 ‘남자 대 여자’로 댓글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 모습과 달리, 실제로 이는 남자 대 여자의 갈등이 아니다. 핑크빛 키티 가방(진품 키티 가방은 꽤 비싸다!) 들고 다니는 어린 소녀나, 명품 핸드백보다 열 배 백 배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중년 사모님은 그런 공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은 젊은 미혼 여성에게 집중된다. 이는 자신과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눌 젊은 여성들을 일부 부유한 상위 계급 남성들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대해 분노한 젊은 남성들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즉, 명품족과 된장녀와 김치녀에 대한 공격은 일부 여성들이 갖는 물질만능주의, 과시적 소비와 성적 문란함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바탕인 것이 아니라 일부 부유층 남성들이 “The Winner Takes It( = Girl) All”하는 현실, 즉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남자들 사이의 계급 갈등이나 청년 실업이 문제의 바탕이지 않을까하고 난 생각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그러므로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모든 인간은 각자의 결함을 가지고 자신이 원했던 바와 상관없는 환경에 태어나서 원치 않은 시대의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까지는 랜덤이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처한 개인적 처지나 상황, 그리고 시대적 역사적 요구를 파악한 후 각성하고 그에 맞게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다. 마리 앙트아네트에게 절대 왕정 타도와 혁명이라는 역사의 커다란 물결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입장에서 최악의 비극을 스스로 불러오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던 계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녀는 그 기회를 놓쳤다. 그러니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필요한 때에 적합하게 깨닫고 성숙하는 삶의 중요성을 알라. 그리고 표면적으로 여성 개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갈등의 본질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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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뮤즈, 쉬광핑의 삶이 여자들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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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셀린느는 저렇게 변했을까?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다. 난 이 시리즈 영화를 개봉 당시의 내 나이와 상황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하며 본다. 남자 주인공의 얼굴만 보는 것은 아니다. 진짜다. 우연이지만, 난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나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남녀가 사랑하고 싸우며 현실의 삶 속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9년마다 보면서, 어찌 내가 그들보다 열 배는 비루해서 더욱 현실적인 나의 삶을 꺼내 보지 않을 수 있으리.

비포 시리즈 1편의 싱그럽던 그들을 보고, 나는 비엔나 갈 일도 없었건만 끈 달린 원피스를 미리 사 두었다. 그리고 9년, 또 9년이 흘렀다. 내 원피스는 옷장 안에서 곱게 삭아가고 있었고… 맙소사, 이번 3편인 <비포 미드나잇>으로 만난 셀린느는 내 원피스보다 더 삭은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화면 속에는 18년 전 비엔나의 천사는 간 곳 없고 신경질적으로 남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정신 사나운 아줌마만 있었다. 왜 셀린느는 저렇게 변했을까? 아니, 왜 저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토록 사랑해서, 제시의 이혼을 기다려 결혼한 그들인데 왜 완벽히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답은 영화 속 둘의 말싸움에 있었다. 제시가 책을 쓰고 출간 행사를 다니며 성공적인 작가의 길로 나아갈 때, 셀린느는 가사와 육아, 비전 없는 직장 생활에 치여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절실한 마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남편인 제시는 너무도 모른다. 아, 그런데 나는 막 알 것 같았다. 셀린느같은 친구들, 언니들, 주위에 역사책에 너무도 많이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눈앞에 한 이름이 영화 속 자막처럼 떠올랐다. 바로 쉬광핑(허광평, 許廣平)!



어린 시절의 쉬광핑 사진


루쉰의 아내, 루쉰의 뮤즈, 쉬광핑

쉬광핑은 그녀 자신의 이름보다 루쉰의 아내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루쉰은 사망한 지 오래 되었지만 1999년 새천년맞이 특집으로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 위클리(亞洲週刊)>사에서 20세기 중국문학 걸작 순위를 매겼을 때 1위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접받는 대작가이다. 한때 중국 본토 공산당에서 우상시되어 과대평가를 받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루쉰은 현재까지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이자 사상가, 혁명가이다. 1881년 중국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주수인, 周樹人)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26세 때 어머니가 정한 여성인 주안과 혼례를 치룬 루신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지만 어머니를 봉양하는 며느리로서 주안을 존중하며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했다. <광인일기>를 잡지 <신청년>에 발표한 이후부터 루쉰이란 필명을 사용하여 그는 문학 창작과 시사평론 집필, 번역 작업에 힘써 많은 글을 발표했다. 베이징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원하던 중, 루쉰은 여대생인 쉬광핑을 만난다. 쉬광핑 졸업 후 상하이로 이주하여 동거를 시작한 둘 사이에 아들 저우하이잉이 태어난다. 이후 사망까지 10년간 루쉰은 쉬광핑의 안정적 내조를 받으며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루쉰 사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을 출간하고 그의 유품을 보존하여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여생을 루쉰 사업에 힘쓴다. 이 정도가 쉬광핑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정도이다. 즉, 쉬광핑은 루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루쉰과 관련해서만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루쉰이 그 빛나는 성취를 이루던 10년간, 그 똑똑했던 신여성 쉬광핑은 루쉰을 내조하며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구 베이징대학(일명 홍루)에서 루쉰이 중국문학사를 강의하던 강의실 모습.

<루쉰 평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허광평은 원래 친구가 운영하는 부녀 잡지사에서 일할 생각이었으나 노신은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이 또다시 이전처럼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는 허광평이 집안에 남아 가사를 돌보고 일어를 배우면서 혼자서 중요한 일련의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를 원했고, 허광평은 노신의 이런 생각에 순순히 따랐다. 그녀는 번역 작업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심전력으로 이런 일에 몰두하게 된 것에 대해 다소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선택의 권리를 포기했다. 십수 년이 지난 후에 그녀는 고백적인 글에서 노신의 호의에 의해 일본어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지만, 동시에 이미 오래전 일로 묻혀버린 노신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노신 평전(p229), 임현치 지음 / 실천문학사」

아, 무언가 아쉽다. 루쉰의 삶에서 쉬광핑을 볼 것이 아니라 쉬광핑의 입장에서 그녀의 삶을 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쉬광핑에겐 잃어버린 10년

쉬광핑은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 이른바 무술변법이 실패로 돌아간 1898년에 광둥성의 중심인 광저우 근처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봉건적인 사회에서 반쯤 개화된 가정’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쉬광핑은 어머니가 묶어준 전족을 하루만에 풀어 버릴 수도, 아기일 때 아버지가 술김에 정한 약혼자와 파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그녀는 고향에서의 혼삿길이 막혔다. 전화위복! 덕분에 쉬광핑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학 가서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텐진의 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한 쉬광핑은 1919년의 5.4 운동을 목격하고 여성운동과 애국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졸업한 후 교사로 취직하지 않고 상급 학교인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구식 교육을 강조하며 반민주적 학사운영을 한 교장을 배척하는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쉬광핑은 강사 루쉰의 조언을 구하면서 가까워져 그의 연인이 된다.


루쉰,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한 쉬광핑

졸업 후 쉬광핑은 고향 광저우로 내려가 교직 생활을 시작하나 학내의 정치적 소요에 휘말려 그만두고 광저우로 따라 내려와 대학 교수가 된 루쉰의 조교로 일한다. 둘은 광저우를 거쳐 상하이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허광평은 루쉰을 내조하며 10년간 전업주부로 산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본처가 살아있는 17세 연상 유부남 스승과의 결혼 결심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쉬광핑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루쉰은 쉬광핑을 위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거나 서류 정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쉬광핑은 거리낌이 없었다. 루쉰 역시 봉건예교의 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법이라고 해도 좋고 불법이라고 해도 좋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겐 상관없는 일이고 당신네들에게도 관계없는 일이다. 요천대 펑쯔(風子, 루쉰을 상징함)는 나의 사랑이다.
-「펑쯔는 나의 사랑 / 쉬광핑 지음,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p.85)」
남들에게 첩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받는 것 외에도 쉬광핑에게 현실적 어려움은 많았다. 평생 타협하지 않은 혁명가의 자세를 유지한 루쉰에겐 논적(論敵)이 많았다. 루쉰은 국민당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있었으며 백색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당이 고용한 저격수가 반대편 집에서 루쉰을 노리고 있기도 했다. 일상이 살얼음판이었다. 쉬광핑은 노쇠한 루쉰과 병약한 아들을 돌보고 새벽까지 글을 쓰는 루쉰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내이자 비서이자 주부로 살았다. 루쉰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많은 작업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시절 날카로운 시사평론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던 그녀, 쉬광핑이 자신을 희생하고 루쉰을 묵묵히 뒷바라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비서 역할을 한 그녀의 재능 덕분에 루쉰은 그렇게 많은 양의 작업을 빨리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허광평에게 “10년 동안 손잡고 어려움을 함께 한 사이”라며 고마워했다.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한 쉬광핑

쉬광핑은 사실은 직장 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루쉰은 글을 쓰는 자신을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반대했기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아마도 남편이지만 17세 연상이나 되는 존경하는 스승이기에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점도 있었고, 당시의 여성들이 받던 낮은 임금 탓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루쉰이 숱한 역경 속에서 때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 가면서 병약한 몸으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저술 작업에 몰두할 때 쉬광핑이 옆에서 그를 보필한 것이다. 쉬광핑은 원래 상하이에 처음 갔을 때 친구가 운영하는 부녀 잡지사에서 일할 생각이었지만, 루쉰이 자신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가내 모든 일을 전담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중략) 게다가 그는 글을 쓴 뒤 아내에게 읽혀 의견을 구한 뒤 수정 작업을 했으므로, 쉬광핑은 그의 글을 베껴 쓰고 교정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논평 작업까지 하는 조교 일을 병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쉬광핑이 몇 번 직업을 가질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루쉰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루쉰은 심지어 한 달 내내 나가서 고생스럽게 일하고 월급을 받아와 봐야 자기가 글 두 편 쓰면 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니 집에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까지 했다.-「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p.136), 윤혜영 지음 / 서해문집」

십년간, 쉬광핑은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루쉰의 초고를 정서하면서, 루쉰 앞으로 배달된 비에 젖은 우편물을 다려서 갖다 주면서, 루쉰을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면서,,, 결혼 전에는 베이징의 대학에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노라를 예로 들어 여성의 자립과 사회생활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던 루쉰이었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이고 사랑하는 남편이라지만 강단에서와 집안에서의 말이 다른 남자와 살면서 쉬광핑은 과연 행복했을까? 이런 생활을 하려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유부남과 세상의 지탄을 받아가며 결혼했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
어머니께서 학생 시절에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 다음부터, 어머니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고 원고 청탁도 거절하면서 친구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현모양처이자 가정주부로 지냈다.
-「나의 아버지 루쉰(p.308), 저우하이잉 지음 / 강」

루쉰 사후 중국 최고위급 인사가 된 쉬광핑

이 시절, 쉬광핑은 베이징에 간 루쉰에게 보내는 편지 외에 다른 글은 전혀 쓰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쉬광핑은 그저 루쉰의 아내, 평범한 현모양처 가정주부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6년, 루쉰 사후 그녀는 더 이상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루쉰 생전의 작품들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는 작업을 총지휘하는 한편, 집필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시사평론이 말 그대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쉬광핑은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국민당 정부 몰래 펴내던 여성 잡지 <상해부녀>를 편집하고 각종 여성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여성해방과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대부분의 글은 주부의 직장 생활과 사회 참여가 주제였다. 쉬광핑은 ‘여성이 가정에서 일하는 것은 남편의 죄수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그녀는 10년간의 내조와 희생의 삶에서 속으로 조용히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10년간이나 절필했는데도 아무 거리낌없이 시사평론을 발표하며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낸다는 점에서 그녀의 지적 능력과 필력을 엿볼 수 있다. 아마 그녀는 루쉰의 초고를 읽으며 혼자 수없이 자신의 재능이 녹슬지 않도록 단련하지 않았을까?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아가며 말이다.

이후 쉬광핑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들어오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벌어진 격동의 시대를 살게 된다. 국민당의 현모양처 운운하는 여성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상하이 여성계에서 활동하던 쉬광핑은 1941년, 반일 문인들을 색출해내려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76일간의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후, 쉬광핑의 글은 공산 혁명에 동참함으로써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의 논조가 확연히 바뀌게 되었다. 여성해방보다 항일과 구국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쉬광핑은 국공 내전에 져서 패주하며 정치보복을 일삼는 국민당을 피해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홍콩을 거쳐 탈출한다. 베이징으로 간 그는 중앙 정부와 여성계에서 최고위급 인사로 활동한다. 1950년대의 쉬광핑은 신중국 건설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며 당과 마오쩌둥을 예찬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루쉰 기념 사업을 벌이는 등 사회에서 맹활약을 한다. 1967년, 문화혁명 때 루쉰의 원고를 압수해간 홍위병에 항의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70세였다.


1956년 루쉰 이장 당시의 쉬광핑(왼쪽)과 쑹칭링(오른쪽, 쑨원의 부인 송경령)

돌이켜보면 쉬광핑은 청 왕조에 반대하는 반봉건 혁명과 공화국을 세우기위한 공화혁명, 반일 투쟁과 공산혁명, 여성해방운동을 골고루 다 겪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목격하고 써 나간 행동하는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과 업적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98년에 <허광핑 문집>이 출간된 다음부터야 그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쉬광핑은 사후에도 루쉰의 후광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쉬광핑이 루쉰의 명성 덕분에 상하이 여성계와 중국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활약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루쉰 사후, 루쉰 추모 사업만을 해 나간 ‘미망인’이 아니었다. 쉬광핑은 루쉰 사후 30여년간 루쉰과 상관없는 자신의 독자적 정견을 보이고 여성해방론을 주장했다. 어떻게 보면 루쉰 사업을 위해 루쉰의 후광으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루쉰의 명성을 이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거리를 두면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중국의 현실만을 비판한 루쉰과 달리 쉬광핑은 ‘루쉰이라면 당연히 이랬을 것’이라는 자의적 해석을 하며 자신의 정치 발언에 스스로 루쉰의 권위를 실었기 때문이다.


루쉰기념관 : 상하이 루쉰공원의 루쉰기념관 입구 모습.

쉬광핑은 공산당 지도하에 여성계를 종속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난 이 글에서 그녀의 공과를 논할 생각은 없다. 쉬광핑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이니 곧 좋은 논문들이 많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평범한 여성인 내가 궁금한 것은 상하이 시기, 루쉰의 만년 10년간을 내조하던 쉬광핑의 마음이다. ‘무능한 남자는 9주(九州, 중국 지역 전체를 가리킴)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유능한 여자는 부뚜막 근처에 머물 뿐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과연 루쉰을 내조하며 부뚜막에 있던 유능한 여자 쉬광핑은 이 속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 인류를 위해 일하기 위해 손 잡고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끄러울 데가 없고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 없이 당당하다.
-「루쉰 사후 다음 해 발표한 시 <사랑을 위하여>쉬광핑 지음,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 (p.130)」
쉬광핑은 혁명에도 사랑에도 열정적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루쉰 사후 재혼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당을 위해 헌신하며 루쉰 사업에만 힘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회고록을 통해 루쉰과 자신의 정신적 연대와 사랑을 강조했다.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니라 인류에 공헌하는 전사 동지로 루쉰과 자신을 정의내렸다. 이는 단순히 루쉰에 대한 쉬광핑의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 표현일까? 아마 쉬광핑에게 그만큼 ‘잃어버린 10년’의 상처가 컸다는 반증이 아닐까? 지난 10년간의 자신의 희생이 그만큼 가치있는 것이었노라고, 그만큼 위대한 남자를 내가 사랑했노라고 세상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먼저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서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똑똑한 여자들이 대개 그러듯이 말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스스로 선택해서 봉건적 예교에 맞서 어려운 결혼을 했건만, 그녀를 묶어 놓은 것은 전족도 봉건적 남성도 아닌 바로 사랑하는 자신의 남자였다. 나는 궁금하다. ‘밖에 나가 일해 봐야 얼마 못 버니 집에서 나를 도와라’라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노라’를 이야기하던 그 입으로 말하는 그 순간의 그 환멸감을 쉬광핑은 어떻게 견뎠을까? 루쉰의 초고를 정서하면서, 남의 글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 과연 쉬광핑은 어떻게 참았을까?


광저우 도서관 앞의 루쉰과 쉬광핑 동상.

그러므로 내 친구 셀린느에게, 세상의 모든 셀린느에게, 나를 포함한 셀린느에게 나는 말한다.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다른 이 아닌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임을 느낄 때 절망하지 말고,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자신을 정당히 이해받지 못해 지쳐 갈 때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여러 겹의 혁명을 겪어내고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쉬광핑, 이 언니의 삶을 보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지 않을 때, 십 년 후든 백 년 후든, 언제든 우리는 세상에 자신을 내 보일 수 있다.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으며 언젠가는 현실에 대해 내 목소리로 발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실 속 셀린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혁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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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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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늘 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행이란 것이 집안에서 손잡고 걸어 다니는 상상 속의 여행이었습니다. 우습긴 해도 그가 무척 문학적이며 감성적인 철학자로 평가되는 배경에는 아마 어린 시절의 상상 속 여행이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상상을 하고 그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그 이야기는 철학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하고 건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동안 주로 집을 지었지만 책도 여섯 권 지었습니다. 집을 한 채 짓고 나면 책을 한 권 쓰고도 남을 만큼 이야기가 모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기초를 깔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붙이고 지붕을 덮는 물리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생활을 깔고 가족의 이야기로 기둥을 세우고 가족의 이야기로 지붕을 덮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땅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건축가는 이 이야기들을 듣고, 둘 사이에 끼어들어 통역을 해주기도 하고, 중재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집이라는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계를 시작할 때 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합니다. 몇 년 전 지은 지 80년이 된 일본식 집을 고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자라고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 칠십대의 집주인에게 기억 속의 그 집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나이를 먹었는가, 어떤 모습으로 남았으면 하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들었습니다.

ⓒ 박영채

심지어 집도 직접 저에게 이야기를 건네왔습니다. 어디가 무겁고 어디가 허전하고 답답하고 등등. 저는 그 이야기를 받아 적고 제가 아는 건축의 언어로 열심히 옮겨나갔습니다.

결국 집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80년대에 당시 유행했던 방식으로 잘못 수리되었던 부분을 바로잡고 집의 원형을 찾는 방향으로 설계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집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집은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자면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영혼과 육체, 혹은 감각과 육체가 늘 붙어있으면서,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왜 안 되지? 하고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합니다. 하긴 생물학적으로도 자신의 부분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전모를 특히 그중에서도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세상일이 그렇습니다. 그런 묘한 역설 속에 진실이 숨어 있고, 그런 묘한 경계 위에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말로 모릅니다. 우리의 감각은 있지도 않은 가상계를 헤매고 다니고, 있지도 않은 허상 위에서 착각을 타고 날아다니고, 있지도 않은 거짓을 먹고 삽니다. 세상은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고, 어디선가 고장 난 레코드판이 끊임없이 되돌고 되도는 것처럼 이상한 구호들이 멈추지 않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고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요.

이렇게 생활해라, 이렇게 아이를 키워라, 이런 집에서 이렇게 집을 꾸며라, 이런 주문에 의해 자꾸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정작 우리 집에 우리 모습이나 우리 생활은 없습니다. 아마도 역사적인 큰 사건들 속에서 나보다는 우리를, 나보다는 민족을, 나보다는 국가를, 하는 식의 ‘멸사봉공’을 강요받으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든가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환경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질문을 하거나 어떤 교시에 대꾸를 하는 행위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욕구는 익명에 숨어서 마구 공격적으로 토를 다는 이른바 ‘댓글’ 속에서 해소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대꾸를 하면서, 질문을 하면서, 의혹을 품으면서, 특히 자신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만들거나 찾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저는 보통 그들이 예전에 살았거나 살고 싶었던 집 이야기를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집의 모습은 대부분 어릴 때 가졌던 기억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KBS <남자의 자격>이라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남자, 건축을 말하다’라는 기획을 통해 출연자들이 살고 싶은 집을 설계하고 모형을 만들어보도록 도와주는 멘토 건축가 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건축에 대해 거의 처음 접하는 출연자들에게 갑자기 설계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 뜬금없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렸을 때 살던 집, 좋아하는 집에 대해 물어보자 이야기가 쉽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출연자는 어릴 때 살던 시골집처럼, 볕이 잘 드는 마루가 있고 거기 앉으면 발아래 강이 흐르고 그 너머 산이 보이는 그런 집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누구나 그런 마음속의 집 한 채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제가 살던 동네에 흠모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다닥다닥 단층집들이 복잡하게 들어서 있는 도시의 주택가에, 훤칠한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풍성한 숲이 있고 담보다 더 훤칠한 높이의 주황색 스페니쉬 기와를 얹고 있는 아주 이국적인 집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눈이 파랗고 피부가 하얘서 인형 같은 느낌을 주는 서양 소녀를 보는 것처럼, 학교를 오가며 그 집을 올려다보고 담을 쓸어보면서 그 안에서의 삶을 꿈꾸어 보았습니다. 이층에 테라스를 거느리고 있는 우아한 방에서는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일 테고, 여름에도 어디선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겨울에도 훈훈한 바람이 불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집은 참 근본 없는 스페인 풍의 집이었는데, 저는 가끔 그 집을 그리워합니다.

들어가 보지도 못했던 그 집이 저에게 불러일으켰던 환상과 아련한 분위기에 대한 저의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들이 지은 네모반듯하고 번지르르한 현대건축보다, 뻐꾸기창이 달린 다락방이 있는 고전적인 벽돌집 혹은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언덕에 펼쳐진 하얀 집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담을 나만의 이야기를 떠올려봅시다. 나를 돌아보고,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나의 현재를 점검하고,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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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노은주,임형남 공저 | 예담
집을 짓기 전에, 이사를 가기 전에,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에, 집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책이다. 노은주ㆍ임형남 부부 건축가는,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하고,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소나기학교’의 기획을 맡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저자들은 집이 가족의 관계를 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과연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은주,임형남 저자의 집 이야기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나의 집은 누구를 위한 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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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 일과가 잘 마무리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얼른 집에 가서 다 잊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열쇠를 꺼내거나 벨을 누른 후, 등 뒤의 세상과 내일 다시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 잠시 이별합니다. 하루의 먼지를 털고,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의 오락프로를 보고, 가족과 그날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그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집이란 결국 가족이 하나의 지붕 아래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가족이 시작이며 끝이지요. 그러나 요즘의 집에는 가족이 없습니다.

그냥 집만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밤이나 12시 넘어 가족들이 자신의 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옵니다. 현관에 달린 감지등이 인기척을 느끼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살짝 비추어주고 금세 다시 잠에 빠집니다.

뭐랄까, 집이란 링에 오르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심호흡을 하는 복서들의 대기실 같습니다. 집은 그냥 혼자서 비어있는 속을 바라봅니다.

가족이 없는 집, 혹은 가족이 있으나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생각을 하는 현대의 집, 아니 한국의 집. 한국적 특수성이 집에는 그렇게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을 비워두고 아이들을 닦달하는 이상한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냥 다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위안하며, 혹시 모를 자식의 성공적인 대학 입시를 위해 참아야 하는 걸까요. 집을 다시 가족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건 그냥 우리가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는 대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의 최후의 보루는 가족입니다.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집입니다.


그런데 가족의 구성이 예전에는 4인 가족이 중심이 되었다면, 요즘은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해졌습니다. 부부와 자녀가 한둘 있는 집일 수도 있고, 부부와 반려동물이 가족인 집일 수도 있습니다. 삼대가 함께 사는 집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장성해서 분가하고 난 후 다시 두 사람이 된 부부가 사는 집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혼자 사는 사람이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며 사는 집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 중에서도 누가 가정의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 집의 구성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보통 남편 중심의 집은 목공이나 기타 취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손님 접대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 중심의 집이라면 각종 가사활동을 쉽게 할 수 있는 도구와 동선이 필요합니다.

ⓒ 박영채

아이들 중심의 집이라면 아이들의 개성과 독립심을 발달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야 할 것입니다. 일찍부터 독립된 방을 따로 준다든가, 혹은 요즘 흔히들 하는 것처럼 거실에서 TV를 없애고 책꽂이와 장난감 수납장을 배치하는 등, 전체 집을 아이를 위한 공간으로 꾸민다든가…….

또한 노인 중심의 집이라면 건강 상태와 직업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왕이면 약점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내가 사는 집인데 나부터 좀 편안했으면’이라고 생각하는 게 모두의 솔직한 진심일 겁니다.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공간을 충분히 차지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 그때그때 가장 배려해야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에 따라 집의 공간 구성도 조금씩 바뀌어야겠지요.

아기가 있다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있다거나, 혹은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있다면 일상의 풍경은 또 다시 변화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식물로는 선인장도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키우던 개가 갑작스레 죽은 뒤로는 개든 고양이든 살아있는 것들을 돌보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찾아오는 분들 중에는 그런 일을 아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 마리의 강아지를 키우는 젊은 부부는, 욕실 안에 편안하게 강아지들을 목욕시킬 수 있는 욕조가 있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진돗개를 키운 적이 있는데, 어릴 때는 욕조에 집어넣고 목욕을 시켰지만 금세 커졌기 때문에 결국 마당에서 전쟁을 치르듯 힘겹게 목욕을 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부부가 키우는 개들은 작은 녀석들이라 다용도실에서 쓰는 개수대 정도의 크기면 충분히 목욕을 시킬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집에서도 주방 근처에 개들이 나란히 서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이를테면 강아지 식탁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 싱크대의 옆면에 홈을 파고 낮은 선반을 달아서 그것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혹은 집에 노약자나 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는 경우는 곳곳에 세심한 배려가 많이 담겨야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건축 및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을 무장애(Barrier-free) 설계라고 합니다. 쉽게 예를 들면 난간을 설치하거나 방과 방 사이의 턱을 없애는 것 등이 기본이 되는, 더불어 사는 공간이라면 집뿐만 아니라 건물 안팎의 모든 장소에 적용되어야 하는 설계입니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거나, 혹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생각해보면 그 필요성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아이들이 아주 어릴 무렵 살던 곳이 연립주택 3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경사로도 없는 그 건물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방과 유모차와 아이까지 수습해서 힘겹게 나가보면, 골목길은 보도와 차도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아 수시로 오가는 차들을 눈치껏 피해야 했고, 포장이 고르지 못한 울퉁불퉁한 길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다 보니 결국은 외출을 가급적 자제하게 되더군요.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이라면 건축되는 규모가 크고 세대수가 많다보니 그런 무장애 설계에 대한 고려가 잘 반영되어 있는 편이지만, 단독주택이나 빌라가 밀집한 지역은 아무래도 개인의 관심과 의지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우리 집은 나를 위한 집이자, 나와 함께 살아갈 누군가를 위한 집입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불편함은 없고, 비싸지 않아도 함께 나누는 삶이 가능한 그런 집을 꿈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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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노은주,임형남 공저 | 예담
집을 짓기 전에, 이사를 가기 전에,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에, 집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책이다. 노은주ㆍ임형남 부부 건축가는,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하고,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소나기학교’의 기획을 맡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저자들은 집이 가족의 관계를 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과연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은주,임형남 저자의 집 이야기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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